기억 안아주기/368쪽/글항아리/18,000원

어릴 때 버섯처럼 미끌거리는 식감이 별로였던 음식을 경험한 아이들은 평생 그 음식을 멀리한다. 학교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가 놀림당한 아이들은 그 상처가 기억에 뿌리를 내려 회사나 공중화장실에서는 큰일을 보지 못한다. 거절을 많이 당한 사람은 특정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려 해도 뇌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고 행동하지 못하게 붙들어둔다. 이 책 기억 안아주기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소확혐)’에 대해 다룬다.

나쁜 기억은 이상하게 잘 잊히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기억력은 약해진다. 하지만, 안 좋은 기억만큼은 어제 일처럼 초롱초롱하다. 두려움의 기억은 편도체가 담당한다. 그곳에 새겨진 기억은 잊으려 노력해서 더 안 잊히고, 자잘한 꼬리 기억인 주제에 몸통을 흔들어 좋은 판단을 하는 데 그르치는 역할을 한다. 뇌와 꼬리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매우 강하게 연결되 있다. 꼬리(편도체)가 머리 행세(전전두엽)를 하곤 한다.

저자는 진료실에서 아이들의 기억에 관여하는 부모들을 만나면서 기억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신체 증상과 통증으로 나타나는지를 간파한다. 사람들은 몸이 아프고 괴로워서 병원을 찾는다. 저자는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어버림으로써 몸과 일상이 회복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반복적으로 떠올라 똑같은 일상이 누구에게는 행복으로, 또 다른 누구에게는 불행으로 각인된다. 새로운 도전에 맞닥뜨려서도 두려움과 호기심이라는 상반된 반응을 일으킨다.

젊어서 전전두엽을 충분히 이용하고 좋은 경험을 많이 한 치매 환자는 순하고 예쁜 치매로 간다. 이에 비해 나쁜 기억에 집착하고 불안에 사로잡힌 치매 환자는 화를 잘 내는 미운 치매로 간다고 한다. 나쁜 기억을 연구한 저자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건망증과 인지 장애를 앓더라도 나쁜 기억은 끝끝내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말수가 적은 13세 민재는 하루에 100번 이상 트림해서 병원을 찾았다. 트림을 하면 배꼽 주위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대변을 보면 그런 증상은 좀 가라앉았다.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통증을 구구절절 설명한 사람은 엄마였다. 누나 역시 민재가 매일 게임만 하고 라면을 많이 먹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아빠도 걱정하는 눈치였다. 정작 당사자인 민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민재가 얘기하려 하면 엄마랑 누나가 끼어들었다. 원래 입이 짧은 아이였던 민재는 가족들 사이에서 발언권이 없었다. 싫어하는 음식들을 엄마가 계속 먹이다보니 학습된 무기력에 더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복통과 트림이 나타난 것이다.

1 성필이도 잦은 복통과 설사가 있는 데다 체중이 늘지 않았다. 인근 병원에서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을 했더니 정상 소견이 나왔다. 하지만 복통은 계속됐다. 엄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필이의 복통이 시작된 것은 초5 때였다.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악화됐다. 특히 아침에 심하다고 했다. 저자가 정황을 파악해보니 사실 성필이는 예전에 학교에서 대변을 봤다가 친구들한테 놀림감이 된 적이 있었다. 그 두려움이 나쁜 기억이 되어 신체화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나쁜 기억에 예민한 아이는 또다시 이런 통증이 올까봐 불안해하며 미리 겁을 먹는다. 자신이 통증을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환경, 시간대 혹은 비슷한 냄새를 접하면 과거의 나쁜 기억이 섬광 기억으로 떠오른다.

아이들의 고통은 대개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서 시작된다. 병이 없던 아이를 환자로 만드는 이들은 오히려 가족이나 의사라는 것이다. 아이는 오히려 나쁜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신체화장애를 나타냈다고 보면 된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아파하는 아이와 가족들 이야기를 늘 접하는 저자는 그 원인을 분석하면서 의학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이 상황들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수천 명의 기능성 증상을 가진 아이들을 진료하면서 비슷한 패턴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은 바로 그 패턴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해 여러 방면으로 확장된 심층적인 분석을 포함하고 있다.

나쁜 기억을 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나 심각한 트라우마도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나쁜 기억은 사소하고 작은 소확혐(小確嫌)’이다. 사실 이 미미한 고통들로부터 우리는 배우며 한 단계 더 성숙한다. 윤리학자들은 말한다. “기억이 존재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불쾌한 기억을 선별해서 지울 수 있다면 인간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아 스스로 고통을 딛고 발전하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더라도 나쁜 기억이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망각의 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가장 훌륭한 방법은 좋은 경험하기와 좋은 기억으로 왜곡하기다.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것이다. 소확혐이 자꾸 떠올라도 일단 내버려두자. 나쁜 기억은 편도체와 해마에 맡겨두고 전전두엽을 활용하도록 하자. 시상하부의 쾌락 중추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마음에 맞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친구를 칭찬해보자. 이 모든 좋은 경험은 뇌 영역 곳곳에 기억의 절편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를 나쁜 기억의 망각으로 이끈다.

나쁜 기억을 좋은 방향으로 왜곡하는 자기합리화는 훈련을 요구한다. 즉 두려워하지 않고 부딪히는 것인데, 인간은 원래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보다 대담하게 일을 저지르는 것을 쉽게 합리화하는 성향이 있으니 주저 말자. 소확혐을 좋은 기억으로 왜곡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훈련시킬 수 있다.

우리의 기억은 세 종류로 이루어진다. 평생 지니고 싶은 좋은 기억,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 그리고 나를 완성시키는 좋은 나쁜 기억이 그것이다. 이 책은 나를 완성시키는 좋은 나쁜 기억이 많아지도록 다양한 사례와 연구를 통해, 독자를 흥미로운 뇌와 감정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저자 최연호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에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에서 소아소화기영양 분야를 전공하는 교수로서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소아청소년 크론병과 궤양성 대장염 치료에서 약물농도모니터링 및 톱다운 전략으로 새로운 치료 기틀을 마련해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복통이나 구토설사 같은 소아의 기능성 장 질환에 휴머니즘 진료를 도입하여 약을 주지 않고 치료하는 의사로도 유명하다책 읽기를 좋아한다. ‘에코의 반서재를 부러워해 집과 연구실 서재에는 전공 서적보다 철학경제학심리학과학 도서를 가득 쌓아두고 있다성균관의대 학장을 맡아 우리나라 최초로 인성 중심의 절대평가제2020년 도입했다. ‘통찰을 기치로 삼아 지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학 교육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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