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영소아청소년과의원 정우영 원장

30여 년의 의과대학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연구실에 널브러져 있던 자료들을 하나씩 둘씩 정리하였다.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전문 서적과 각종 학회에서 받았던 자료집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손때들이 묻어 있었고, 특정 페이지가 접혀 있거나 포스트잇이 첨부되어 있었다. 치열했던 대학 교수로서의 삶의 흔적은 당연히 논문 작성과 관련된 자료들 모음집이나 참고문헌들의 묶음에 단단히 스며들어 있었다. 수정본을 만들기 위해 몇 날을 뜬 눈으로 지새우던 지난날들은 머지않아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남의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시간은 이처럼 잊혀지기도 하고 다가올 새로운 앞날에 대한 설레임으로 기다려지기도 한다.

성장호르몬 연구에 많은 노력과 정열을 쏟아 부었던 지난 세월들은 과연 어떤 얼굴로 내게 남아 있게 될까?

UCLA 메디칼 센터에서 post doctoral 과정을 연수하면서 만성신부전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유전자 재조합형 성장호르몬 치료의 안정성과 효능>에 대한 과제의 연구팀원으로 참여하여 소아신장학과 소아내분비학의 통합 진료를 담당하게 된 것이, 의사로서의 내 인생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장호르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귀국 후 성장호르몬이 나의 연구 생활과 임상 진료의 핵심 분야가 되었다.

2007년 질병관리본부가 실시한 경상권 희귀난치성 질환 지역거점병원사업에 책임연구자로 선정되었다. 2016년 희귀질환 관리 종합계획 수립을 위한 국회 공청회에 희귀질환 전문가로 참석하여 관련법 제정에 주춧돌을 마련하였다. 부산, 울산·경남 지역 내의 희귀질환자들의 꾸준한 증가와 함께 지역거점병원 사업이 활성화되면서, 2019년부터는 경상권역이 다시 부산권과 울산·경남권 지역으로 세분화 되었고, 나는 부산권역 희귀질환센터의 센터장으로 선정되어 정년에 이를 때까지 이 사업을 진행하였다.

지역거점병원 사업 기간 중에 만났던 다양한 원인에 의한 저신장 환자들과의 만남은 내 대학교수 시절 연구의 탄탄한 방향타가 되었다. 오랜 투병의 시간을 미진단 상태로 방황하면서 고통과 좌절을 겪어 왔던 환자들에게 진단적 방황을 종결 시켜 주었던 순간들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연구실의 낡은 서랍들 속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조그마한 상자들 속에는 지난 내 삶의 편린들을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는 흔적들이 숨 쉬고 있었다.

적지 않은 환자와 보호자들로부터 받았던 손편지들이 그렇게 내 곁에 묵묵히 지금까지 머물러 왔다. 또박또박 힘들여 눌러 쓴 편지들은 그렇게 그냥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는 그림도 있고, 메모도 있고, 생신 축하 카드도 있다. 크리스마스 카드도 있다.

나는 그동안 어쩌면 너무 정형화된 의사로서의 삶을 사는 데만 급급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회한이 덮쳐온다. 신체적 외형의 키에만 집착하다 보니 정작 마음의 키는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가?

손녀에게 물었다. “마음에도 키가 있을까?”

손녀가 대답했다. “마음에는 신호등이 있어요. 첫 번째는 기다리는 신호등, 두 번째는 상대방과 나의 마음을 생각하는 신호등, 세 번째는 모두를 이어 주는 신호등.”

또 대답했다. “마음의 키는 자신감을 올려 주는 키가 아닐까요?”

개원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면서, 의사로서의 어떤 역할이 남은 내 삶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를 몇 날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무심히 스쳐 보냈던 의사와 환자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처럼, 선생과 제자처럼, 동네 어른처럼 지난 세월을 함께 보냈지만 잊고 지냈던 추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어 소중히 어루만져 본다.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소아내분비 분야의 특화된 진료를 계획하고 있지만, 이제는 지난날처럼 희귀난치성 분야의 환자들을 진료할 기회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환자의 복합적인 증상 양상과 영상의학적 검사를 포함한 각종 검사 소견에서 실 날 같은 진단적 실마리를 발견하고는, 유전자 검사를 포함한 전문적인 진단적 평가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병원 내의 여러 임상 과에 분주하게 협진 의뢰를 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대신 그간 하지 못했던 환자들 내면의 면면들을 세심하게 보살필 것이다.

빛바랜 적지 않은 수의 편지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분히 읽어 보았다. 감사와 존경, 그리고 다시는 병마에 시달리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의 내용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과연 나는 이런 편지를 받을 만큼의 의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왔는가?’라는 두려움과 미안함이 밀려온다.

분명한 사실은 내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을 되새기며 지난날에 아쉬웠던 부분들을 채워갈 수 있을 시간이 아직은 남아 있다는 점이다.

시간과 앞날은 만들어가기에 달렸다.

신체적 외형의 모습에만 매달리지 말고 마음의 신호등을 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늘 푸른색은 아닐지라도.

 

정우영 원장은 부산의대를 졸업한 소아청소년과, 소아내분비 전문의로 30여년간 부산백병원에서 저신장증 환자 등을 치료해왔다. 부산백병원 유전자연구위원회 위원장, 희귀난치성질환센터장, 희귀질환 경상권·부산권 거점센터장, 국가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시범사업 희귀질환 전문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2022년 4월 정년퇴직 후 해운대 대우월드마크센텀아파트 상가에 정우영소아청소년과의원을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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