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영소아청소년과의원 정우영 원장

의과대학 시절, 감히 말하건대 의대생이라면 예외 없이, 부신 스테로이드 합성의 주요 경로를 설명한 작은 사각형 격자로 둘러싸인 미로에서 방황했던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콜레스테롤이라는 발원지에서 시작하여 마치 작은 폭포의 연속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던 험란한 꼬불길을 평생 지천으로 들락거리게 될지를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선천성 부신 과형성증은 부신 피질의 스테로이드호르몬 합성에 관여하는 경로에 관련된 여러 효소들의 결핍으로 코르티솔 및 알도스테론의 합성이 감소하여 부신피질저하증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서 뇌하수체의 부신피질 자극호르몬 (ACTH) 이 증가하여 부신의 비대와 과형성을 야기 하는 질환이다.

이를 원인 유전자의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스테로이드호르몬 합성에 관여하는 경로에 관련된 여러 효소들의 합성을 담당하는 단일 유전자(single gene)의 변이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군으로, 상염색체 열성 유전 방식을 보인다. 95% 이상이 21-hydroxylase deficiency 에 의해서 발생하는데, CYP21A2 유전자 변이에 의한다.

당연히 관련된 변이 유전자에 따라 표현되는 임상적 양상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생화학적, 내분비학적, 병리조직학적 그리고 성 결정 등과 같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복잡한 문제들을 내재한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키가 매우 작은 남학생이 성장클리닉을 찾아왔다.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몇 번의 뜸을 들이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손주가 반에서, 전교에서 키가 제일 작다고 하셨다. 아직 이차 성징도 전혀 없다고. 그리고 고추가 너무 작아서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셨다.

검사 결과 CYP21A2 유전자 변이에 의한 선천성 부신 과형성증이었다.

또한 염색체 검사 결과 46, XX 여성이었다.

소아 내분비 분야에서 성선자극호르몬-비의존전성 성조숙증의 원인 질환 중에서 선천성 부신 과형성증이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한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춘기 성조숙증은 성선자극호르몬-의존성으로 같은 성으로 성조숙증이 발달하지만, 이 경우에는 여아가 남성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의 성기가 아니라 클리토리스의 이상 과대 발달로 인한 남성의 외형적인 모습을 할머니가 남자로 오인하셨고, 이미 오랜 기간을 남자로 양육하여 온 상태였다.

어떠한 이유든 성별이 뒤바뀌어 성장해 온 경우, 성장 과정에서 당사자가 겪게 될 일들은 상상 하기조차 쉽지 않다.

유사한 경우의 진료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을 수소문해 개별적으로 접촉하였을 뿐 아니라, 환자에게 적합한 치료 방침에 대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 토의도 수없이 거쳤다.

이 과정에서 배웠던 소중한 경험은 의사에게서 정확한 진단이란 명제는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최종의 목적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

이 환자와는 거의 20여년 이상의 세월을 함께 하였다.

작은 키는 이 질환과 연관 되어 있는 다른 복합적인 문제들에 비하면 어쩌면 경한 편에 속하는 증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환자 본인에게 작은 키는 성인이 되어서 본인이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높은 장벽으로 다가 올 것이며, 더욱이 남자로 살아감에 있어 현재 진행형의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외래가 없는 어느 날 환자가 불쑥 연구실로 찾아왔다.

선생님 언제 여자 친구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데 시간 내 주실 수 있겠어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로서는 영광이지. 언제든지 함께 찾아 와라.

실은 나는 이 대답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면 망설이거나 쭈삣거리지 말자고 생각을 정리해 둔 상태였다.

유사한 증례의 치료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과 논의를 하던 중에, 환자가 결혼을 예정하고 있으며,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주례를 부탁해도 되느냐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동의를 얻은 후에 성전환 수술에 대한 환자의 강한 요청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전환 수술은 시행하지 못했고, 이 환자는 남자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면서 씩씩하게 생활하고 있다.

이제 20살이 갓 넘은 또 다른 여자 환자가 문득 생각난다. 비교적 일찍 진단 받았고 키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랐으나, 부신 안드로겐의 영향에 의한 남성화는 막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제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언제가 제일 눈물 나고 힘든지 아세요?”

순간 생각이 복잡해졌다.

“....”

"화장실에 갈 때 마다 내 목소리와 얼굴을 쳐다보고는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에 와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날은 정말 슬프고 화나요.

환자와의 진솔한 대화는 참으로 소중하다.

내가 말을 하는 것보다 환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기에 충분할 때가 많다.

이들에게 나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로 곁에 남아 있고 싶다.

정우영 원장은 부산의대를 졸업한 소아청소년과, 소아내분비 전문의로 30여년간 부산백병원에서 저신장증 환자 등을 치료해왔다. 부산백병원 유전자연구위원회 위원장, 희귀난치성질환센터장, 희귀질환 경상권·부산권 거점센터장, 국가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시범사업 희귀질환 전문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2022년 4월 정년퇴직 후 해운대 대우월드마크센텀아파트 상가에 ‘정우영소아청소년과의원’을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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