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프린트/720쪽/부키/33,000원

20127월 미국 콜로라도주 오로라의 한 극장에서 총기 난사로 12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망자 중 세 청년은 쏟아지는 총탄을 몸으로 막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놀라운 선택을 했다. 어느 쪽이 인간의 참모습일까?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른 괴한일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청년들일까? 어느 쪽이 인간 사회의 본질일까? 폭력과 증오이기심과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일까, 협력과 사랑, 이타심과 헌신이 이끄는 세상일까?

이 책은 예일대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교수이자 인간본성연구소 소장인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가 인간 본성과 인간 사회 진화의 목적과 기원을 밝히기 위한 30여 년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걸작이다. 의사면서 자연과학자이자 사회과학자라는 특이한 직함을 가진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위대한 지성, 통섭의 대가로 불린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그는 이 책에서 난파선 조난자부터 남극 기지까지, 히말라야 소수 민족부터 대규모 온라인 게임 이용자까지, 기생성 흡충과 개미부터 고래와 코끼리까지, 유전자와 호르몬부터 온라인 플랫폼과 인공지능봇까지 인간계동물계기술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면서 유전학진화생물학신경학사회학인류학심리학경제학통계학테크놀로지역사철학을 아우르는 깊고 넓은 연구와 통찰을 선보인다.

이런 방대한 탐구 끝에 저자는 단언한다. 우리가 인생 경험, 사는 곳, 겉모습까지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인간 본성에는 사랑우정협력학습 능력을 비롯해 탄복할 만한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고. 우리는 그동안 부족주의와 폭력성이기심잔인함 같은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췄던 반면, 밝은 면은 너무 등한시해왔다고.

9000만 년 전 포유류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해 30만 년 전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가 오늘날 가장 번성한 종, 세계를 정복한 종이 될 수 있었던 요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가 지구를 지배할 수 있게 된 건 두뇌나 근력 때문이 아니다. 함께 뭉쳐서 사회를 만드는 이 능력 덕분이다.

1864년 인버콜드호와 그래프턴호가 오클랜드섬 반대편 해역에서 각각 난파했다. 인버콜드호에서는 조난자 19명 중 겨우 3명이 생존했다. 그래프턴호에서는 조난자 5명 모두 생존했다. 무엇이 두 조난 집단을 운명을 갈랐을까?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남극대륙 탐사에 나선 섀클턴 탐험대는 얼음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총 513일 동안 28명 모두 구조될 때까지 생존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월든에서 사람들과의 교류를 거부한 채 고립된 삶을 추구했던 소로는 무슨 수로 구치소에서 풀려났을까? 기존 사회 질서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의 모범을 제시하려던 유토피아 공동체 브룩팜은 왜 스스로 붕괴하고 말았을까?

이스라엘의 유명한 자발적 민주 공동체 키부츠는 아이들을 부모와 격리된 공간에서 양육하는 공동 육아를 통해 가부장제 타파와 젠더 평등을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이들을 가정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남극 기지 월동대원들의 사회 연결망은 왜 어떤 해는 원활하고 어떤 해는 파편화되었을까? SF 속 상상 사회는 아무리 극단적인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조차 어째서 서로 비슷하고 여전히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특징들을 지니는 걸까?

저자는 이 책에서 난파선 조난자 집단이나 섀클턴 탐험대처럼 우연히 만들어진 공동체부터 소로의 월든이나 키부츠처럼 자발적으로 생겨난 공동체, 대규모 온라인 게임 집단이나 SF 속 상상 사회처럼 인공적으로 만든 공동체까지 다채로운 집단의 사례를 살핀다. 이를 통해 이런 공동체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더 많고, 서로 사랑하고 돕고 배우는 능력(‘사회성 모둠’)의 실천 여부가 공동체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임을 보여준다.

이 모든 탐구는 인간은 선할까 악할까?’ ‘세상은 더 좋아질까 더 나빠질까?’라는 질문에 궁극적으로 답한다. 저자는 단언한다. “진화의 역사를 통틀어 우리 유전자(그리고 우리 친구들의 유전자)는 더 안전하고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해온 듯하다. “우리 진화 역사의 궤적은 길다. 하지만 이 궤적은 좋음’(선함)을 향해 휘어져 있다.

진화의 역사는 환경에 잘 대처하는 데 최적화된 형질을 선호해 최적의 해결책을 찾는 자연선택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인간 환경에서 가장 큰 위협,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다른 인간의 존재, 즉 사회 환경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이해하는 3개월짜리 아기, 말이 통하지 않아도 잘 어울려 노는 아이들에게서 보듯 인간은 아주 어릴 때부터 사회를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긴다.”

빌 게이츠의 말대로 이 책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세상이 양극화가 얼마나 극심한지 매일같이 보도하는 뉴스 헤드라인으로 우울하기만 한 시대에 인간 본성과 사회를 다룬 대가의 작품이 낙관과 희망으로 넘쳐나는 것은 기쁘고도 반가운 일이다.

우리가 갈수록 더 많이 사랑하는 종으로 진화 중이고, 우리 유전자에 선한 본성과 좋은 사회를 만드는 능력이 새겨져 있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차별과 혐오갈등다툼에 지친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준다.

저자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Nicholas A. Christakis)

위대한 지성, 통섭의 대가로 불리는 사회학자, 의사다. 예일대학교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교수이자 사회학생태학진화생물학통계데이터과학생물의학공학의학경영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또 예일대학교 인간본성연구소 소장과 네트워크과학연구소 공동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예일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 학위와 공중보건학 석사 학위를,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시카고대학교 사회학 및 의과대학 교수를 지낸 뒤, 2001년부터 2013년까지 하버드대학교 의료사회학 및 의과대학 교수로 근무했다. 2013년 예일대학교로 옮겨 솔 골드먼 패밀리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8년 예일대학교 교수진 최고 직위인 스털링 교수로 임명됐다. 과학 지식과 인문학적 혜안을 동시에 지닌 이 시대 독보적인 석학으로 행동건강장수의 사회경제학, 생물사회학진화학 연구와 사회 연결망 연구로 유명하다. 네트워크과학과 생물사회과학을 중심으로 진화생물학진화심리학행동유전학전염병학인구학사회학을 융합해 탁월한 연구 성과를 발표해왔다. 의사로서는 가정호스피스 의사이자 상담완화의학 분야 전문가로 활동했다. 2009<타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에 선정됐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연속으로 <포린폴리시> ‘세계 100대 사상가에 뽑혔다. 지은 책으로 블루프린트외에 예견된 죽음: 의료에서 예측과 예후》 《행복은 전염된다(공저) 신의 화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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