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연구윤리라는게 빠릿빠릿 하지 않던 시절, 그러니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자연과학사의 벽장에는 꽤 많은 해골들이 쌓여있다.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짤막한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Giovanni Grassi는 이탈리아의 기생충학자로 다양한 연구를 했다. 1898년처음으로 말라리아(P. falciparum)의 생활사를 밝혀내기도 했고, 분선충의 생활사를 밝혀내기도 했으며 편충과 회충의 생활사를 밝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대단한 기생충 학자이긴 하지만, 이 모든 업적을 그가 쌓은 것은 아니다.

회충은 아마 인간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기생충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자기 똥에 섞여 나오는 20cm 크기의 지렁이가 꿈틀거리는걸 못 보고 지나칠리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정확한 생활사가 밝혀진 것은 1886년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당시 Collandruccio와 Grassi는 둘 다 회충의 생활사를 밝혀내기 위해 열심히 회충의 알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회충의 알이 인간의 장내에서 성충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부러 뭘 하려고 노력하면 더 안된다는 것이 여기서도 증명되는 것인지 계속 실패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역시 연구윤리 따위가 확립되어 있던 시절이 아니라 Collandruccio는 꼬마아이에게 150개의 회충 알을 먹였고, 아이는 143마리의 회충을 배출해냈다. 처음으로 회충의 생활사가 증명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만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더 추해진다. Grassi는 Collandruccio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연구결과를 훔쳐서는 자기 연구인냥 발표해 버린 것이다. 물론 발표된 논문에 Collandruccio의 이름은 언급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이런 역경에도 Collandruccio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편충의 생활사를 밝혀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또 다시 자기를 실험 대상으로 삼이 위해 일단 6개월 동안 매일 자신의 변을 확인했다. 자신이 이미 편충에 감염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편충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 후, 편충알들을 삼켰다. 결국 4주 후 편충 알들이 Collandruccio의 대변에서 검출되기 시작했다. T. trichiura가 인간에 기생하는 편충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또 돌고 돌아 Grassi는 Collandruccio의 편충 연구 결과를 다시 자기 것인냥 발표해버린다. 그나마 이번에는 Collandruccio를 한번쯤 언급해 주었을 뿐이었다.

결국 지금 Collandruccio의 이름은 검색도 되지 않는데 반해 Grassi는 위키백과 항목에도 있을 정도로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Collandruccio의 열정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역사는 무심하지 않으셨는지 Grassi에게도 시련을 마련해두었다. 1902년 Ronald Ross는 말라리아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말라리아 기생충 중 가장 중요한 falciparum 말라리아의 생활사를 밝혀낸 Grassi는 공동 수상자에서 빠져있었다. 정치적인 상황과 기만, 속임수, 알력싸움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Bob Desowitz의 the Malaria Capers를 참고하시길. 어쨋든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게 마련이라는 이야기.


+)회충 발견의 역사는 그야말로 열정(?!)의 역사인데 Grassi와 Collandruccio가 생활사를 밝혀내기 위해 열심히 회충알을 집어삼켰던 것 처럼 일본의 기생충학자 Shemesu Koino역시 회충의 유충이 인체내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회충알 2000개를 집어 삼켰다. Collandruccio보다는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회충에 성공적으로 감염되어 3일 후 자기 침에서 회충 유충을 발견해내어 생활사의 빠진 부분들을 메꿔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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