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두증이라는 병이 있다. 정상적으로 뇌를 둘러싸고 있는 지주막하 공간 그리고 뇌실 내에 분포해 있는 뇌척수액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경우를 이른다.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는데 크게 뇌척수액의 생성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경우, 뇌척수액 흐름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 그리고 정맥동에서 뇌척수액의 흡수가 비정상적으로 감소한 경우를 크게 그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뇌척수액이 증가하다보니 뇌실질을 누르게 되고, 그에 따라 수두증 환자들은 보행 장애 혹은 인지 장애, 배뇨 장애 등의 증상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수두증의 경우 대개 단락술이라는 방법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뇌척수액을 제3의 공간으로 빼주는 수술을 치료방법으로 선택하게 된다. 단락술은 쉽게 말해서 뇌실 내에 고여있는 뇌척수액이 복강이나 혈관 등으로 흐르게끔 통로를 만들어 주는 방법인데, 수두증의 원인, 타입 등에 따라 VP shunt(뇌실-복강 단락술), VA shunt(뇌실-혈관 단락술), LP shunt(허리-복강 단락술) 등의 다양한 하위 수술법이 있다. (대개는 VP shunt를 시행한다.)




V-P shunt는 머리에서 복강으로 관을 삽입하기에 머리카락 shaving이 필요하지만,
L-P shunt는 허리에서 복강으로 관을 삽입하기에 머리카락 shaving이 필요없다.


 20세의 한 여성과 잊을 수 없는 악연(?)은 바로 이 수두증 수술 때문에 시작되었다. 양측 동측성 반맹을 주소로 안과와 신경과를 거쳐 'pseudotumor cerebri' (이 경우 증상은 있지만 대개 수두증의 원인이 될만한 뇌실 확장 소견 등의 해부학적 문제는 없는 상태를 이른다.)라는 진단명으로 신경외과로 전과되었던 그 여자아이는 단락술을 통해서 증상 호전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교수님의 판단에 따라 수술을 결정짓고 하루이틀 수술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친구였다.

 아직은 신출내기 1년차의 때를 벗지못한 나였기에 단락술(shunt op)을 시행한다니 당연히 VP shunt(뇌실-복강 단락술)라 생각하고 수술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shunt 수술은 뇌실부터 복강까지 기다란 관을 외부에서 삽입하는 침습적인 수술이기 때문에 감염이나 출혈 등의 합병증에 더욱 신경을 써야했고, 그에 따라 수술 전날 수술부위에 대한 shaving(털밀기) 및 prep(소독액으로 미리 수술부위를 닦아주는 작업)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다. VP shunt 자체는 통상적으로 흔히 이루어지는 신경외과 수술이기 때문에 다른 때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VP shunt(뇌실-복강 단락술)에 대한 수술 준비 오더를 입력했고, 인턴 선생은 그 오더에 맞추어 스무살 여성의 머리를 전부 밀고, 빠알간 소독액으로 열심히 수술 부위를 prep해두었다.

 긴머리를 한순간에 밀려버린(?) 그 여성은 밤새 슬픔에 잠겼고, 다음날 불어닥칠 폭풍은 예상하지 못한채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자부하며 늦은 시간 나는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기어이 사단은 일어나고 말았다. 의국은 난장판이 되어있었고, L-P shunt(허리-복강 단락술)가 예정되어 있었던, 그것도 20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의 머리가 빡빡 대머리가 되어있는 광경을 수술방에서 마주한 교수님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모든 의국원이 소집되고, 1년차 인생 최대의 실수를 범한 나는 절체 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처음으로 '도망쳐야겠다'라는 생물학적 본능이 뇌 깊숙한 곳에서 나의 두피를 끊임없이 자극했고, 수술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머리가 쭈뼛선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수술이 끝나고 그 아가씨를 수술방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보호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개를 떨군채 사과드리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들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다행히 고개를 푹 숙힌채 말이 없던 나에게 그 아이의 부모와 할머님은 오히려 두손을 꼭 부여잡고 치료해줘서 고맙다라는 말만을 연신 되풀이 할 뿐이었다. 20대의 젊은 아가씨를 일순간에 skin head로 만들어버린 나의 잘못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생한다며 내 등만 토닥여 줄 뿐이었다.

 이 사건은 한동안 신경외과 관련 병동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해바라기의 차태현-김정은 사례를 들먹이며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고(차태현도 김정은의 머리를 밀어버렸다.), 일부는 거구에는 역시 skin head가 어울린다며 나를 애써 격려해주기도 했다. 미안한 마음에 도무지 그 아이를 만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전문간호사 선생님에게 드레싱을 일임해버렸고, 퇴원하는 그날까지 미안하다는 한마디조차 건네질 못했다. 실제로 LP shunt는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수술은 아니며, 이제 갓 1년차가 된 나의 현실적 무지함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후 책을 뒤적여서 정확한 수술 적응증을 찾아보고 난 후에야 내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회자되었던 그 사건은 젊은 아가씨를 skin head로 만들어버린 미안함 만큼이나 내게는 잊지 못할 소중한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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