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환자 그리고 환자 보호자와 대면하다보면 어느새 환자의 증상 호전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대한 신뢰가 쌓이게 되는데 이것을 라뽀(rapport)라고 한다. 라뽀란 프랑스 말로서 상호 심리적 신뢰관계라는 뜻이며 환자와 의사 사이에 두터운 믿음이 있을 때 ‘라뽀가 좋다’ 라고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항상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 ‘라뽀가 나쁜’ 관계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는 반사회적인 성향의 환자 때문일 수도 있고 의사의 설명이 불성실하거나 태도가 예의바르지 못한 경우 보호자의 불만이 쌓여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라뽀가 형성되지 않는 경우 사소한 문제로도 환자와 의료진 사이에 다툼이 벌어질 수 있고, 이것은 환자의 치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이 없으면 나을 병도 낫지 않는다.

그래서 갓 의사고시를 치룬 초보의사들에게 나는 항상 라뽀를 중요시 하라고 말했었다. 라뽀가 좋은 경우 퇴원하면서도 꼭 나를 만나 인사를 해야겠다며 외래까지 찾아오는 경우도 흔하다. 할아버지뻘 되는 분께서 내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하시면 나도 황급히 일어나 인사를 받곤 했는데, 그래도 기분 좋게 치료받고 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해지곤 했다.

라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해보고자 한다. 신경과 특성상 대부분의 환자가 할머니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다 보니 그저 나를 의사가 아닌 손자처럼 예뻐해 주시는 경우가 꽤 있다. 환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도 그런 대접이 영 싫지만은 않다. 가끔 나보고 결혼했느냐고, 중신을 서주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경우 정중히 사양하곤 한다. 최근에도 70대 할머니께서 내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내가 딸이 하나 있으면 시집보내고 싶구먼!”

병실에 있는 다른 어르신들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껄껄껄 웃음을 터뜨리셨다. 나도 같이 웃지만 속으로는 난감하기만 했다.

‘할머니, 할머니 딸이면 저한테는 어머니뻘인데요.’

나름 동안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한테는 안 먹히는 모양이다.

최근에도 나에게 아가씨를 소개시켜주겠다던 분이 있었는데, 꽤나 까다로운 분이였다. 환자의 부인이었는데 그 아저씨께서는 병을 오래 앓으셔서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다.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증상이 계속 악화되었는데, 보호자인 아주머니께서는 매번 병원에 올 때마다 불평을 늘어놓았다. 침대가 깨끗하지 않다느니 입에 뭐가 묻어있다느니 기저귀를 제대로 갈지 않느냐느니...... 아무리 조심해도 별 것 아닌 것으로 트집을 잡으니 간호사들이 질릴 정도였다.

간호사는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중간에서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조금만 참고 환자에게 좀 더 신경을 써주라는 말을 할 밖에. 다행히 그런 불만과 신경질 속에서도 간호사와 간병인은 어쨌든 불평을 없애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아주머니는 다행히 나와는 라뽀가 좋은 편이었다. 성격이 까다로운 것을 알았기에 나는 회진 돌며 만날 때마다 최대한 자세하고 정중하게 설명을 드렸고, 아주머니께서는 내 설명에 꽤 만족해했다.

아저씨의 상태는 날로 악화되어 결국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 되었다.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하시도록 권유하였으나 아주머니는 거부하셨다. 이미 오랜 투병으로 바짝 말라 거죽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 하셨다. 나는 아주머니를 설득했지만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저씨께서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치러진 후, 아주머니께서 외래에 찾아오셨다. 음료수 한 박스를 내려놓으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셨다. 나는 잊지 않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아저씨께서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말씀드렸고, 장례 치른 이야기가 조금 오고갔다.

그러던 중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나보고 애인 있느냐고 물으셨다. 애인이 없다고 하자 아주머니께서 누군가를 소개시켜주시겠다고 하셨다. 마침 애인도 없고 쓸쓸한 터라 조금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래도 보호자께 소개를 받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아 사양을 하는데 아주머니께서 적극적으로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장가갈 나이도 됐는데 지금까지 애인이 없으면 어떡해. 내가 누구 좀 소개시켜줄게.”

“괜찮습니다. 하하.”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한 번 만나봐.”

“아니, 누구 길래 이렇게 열심히......”

“내가 딸이 하나 있는데.......”

잠시 멍하던 나는 뭔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분이 내 장모님이 되시는 건가? 병동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며 화내고 까다롭게 굴던 그 분이 모습이 휙휙 지나갔고, 나는 순간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아...... 저기.......”

“어때? 한 번 만나볼려?”

“사실 저 애인 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갑자기 애인이 있다고 하니 아주머니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내 눈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가 시선을 피하면 아주머니의 의심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의 정적 속에 아주머니와 나는 눈싸움 하듯 서로의 눈동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네. 정말요.”

“진짜?”

“네.”

나는 어색하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은 정적이 지나간 후, 아주머니가 슬쩍 눈을 내리깔며 책상 가까이 당겼던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애인 있으면 어쩔 수 없지.......”

“아유,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애인만 없었어도.”

인사치레를 하며 나는 아주머니께 인사를 했고 아주머니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긋거리며 진료실을 나가셨다. 그제야 나는 긴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라뽀가 너무 좋아도 이런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루였다. 당분간은 아주머니를 만나면 애인이 있는 것처럼 행세해야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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