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 2학년 때의 일이다. 본과 진학 전에 무언가 추억에 남을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친구 두 명과 함께 지리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등산은 더욱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친구가 꼭 가자고 꾀는 바람에 별로 원치 않는 지리산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지리산에 오르기 전에 대충 코스를 정했는데, 노고단으로 가는 것은 너무 평범하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지리산에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일단 뱀사골로 올라가서 정상에 오른 후 내려오는 길은 상황 봐서 정하기로 했다. 오후에 시작하는 3박4일의 일정이었다.

3박4일 동안 먹을 것을 마트에서 사서 배낭에 짊어지고 호기롭게 지리산으로 떠났다. 당시에는 승용차를 가진 친구가 하나도 없었기에 버스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물어물어 뱀사골 입구에 도착하니 저녁 5시 정도였다. 쉼터까지 오르기에는 여유가 좀 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뱀사골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지리산 입구 표지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우리. 친구가 등산로를 표시하는 붉은 리본을 찾아냈다.

“야, 여긴가 보다.”

좁고 험준한 등산로였다. 우리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무장공비들이 지리산에 들어와 있으면 잡지를 못했다던데, 이래서 못 잡았구나?”

“지리산에 곰도 산다면서?”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마음으로 우리는 씩씩하게 등산로를 걸어 올라갔다. 험한 등산로가 힘겨웠지만 그래도 이정도 고생은 각오한 터였다.

“이상하다? 여기쯤에 샘물이 하나 있어야 하는데?”

앞서가던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입구에서 얼마 안 되어 샘물이 하나 있다고 지도에 나와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빈 페트병만 가져왔을 뿐 물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었다. 숨은 턱턱 차오르는데 물을 마시지 못하니 답답했다. 그런데 그 샘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좀 더 올라가면 있지 않을까?”

“그래. 좀 더 올라가보자.”

우리는 좀 더 올라가기로, 좀 더 올라가기로 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걸었다. -_-;

하지만 여전히 샘물을 나오지 않았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 등산로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나마 넓지도 않던 등산로가 사람 한 명 지나다닐 정도로 좁아져있던 것이다.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야, 우리 제대로 온 거 맞아?”

“아까 입구에 리본 달린 곳은 여기밖에 없었잖아.”

“근데 너무 이상하잖아. 샘물도 안 나오고. 길도 좀 틀린 거 같은데?”

“그냥 내려갈까?”

하지만 이미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내려가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내려가서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간다 해도 제 시간 안에 쉼터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였다. 우리는 잠시 고민해야했다.

“우리, 미아가 된 건가?”

“아마도 그런 듯?”

“그렇다고 내려가기에도 이미 늦었잖아?”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 봐야 소용없다 설전이 오간 후에 우리는 중대한 결론을 내렸다.

“길이 있으니까, 가다보면 나오지 않겠어?”

아, 정말 대책 없는 결론이었다. 물론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어딘가로 갈 수는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물 한 방울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물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날은 저물어 랜턴 하나에 의지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이미 등산로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보이지 않는 돌산을 기다시피 하여 오르다보니 겁이 덜컥 났다. 지리산에는 산짐승도 많다던데...... 게다가 너무 오래 등산을 해서인지 힘이 들고 목은 타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 상황에서 마침 큰 공터 하나가 나왔다.

“야, 힘들어서 더 못가겠다.”

“그냥 여기서 노숙할까?”

깜깜한 밤에 길을 더 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게다가 무슨 산짐승이 덤벼들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좀 더 안전한 방향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우리는 나무와 마른 풀을 주워와 공터 가운데에 불을 지폈다. 국립공원 내에서는 불을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조난당한 상태였다. 차라리 이 불빛을 보고 누군가 우리를 구출해줬으면 싶었다. 물이 없으니 음식을 만들 수도 없었다. 우리는 라면을 조금 부숴먹고 침낭을 폈다. 목이 말라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불침번을 서자.”

지리산에는 곰도 살았다고 하니, 이대로 잠들 수는 없었다. 충분한 나뭇가지를 모아온 우리는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침낭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려는데 도무지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자는 둥 마는 둥 선잠을 자고 있는데 친구가 나를 깨웠다. 내 차례가 된 것이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노라니, 참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도 얼마 다니지 않는 녀석이 산에 오른다고 하더니 길까지 잃고 노숙을 하게 되었으니...... 신세한탄을 하며 모닥불을 뒤적이던 나는 나무숲 사이로 무언가를 보았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등을 타고 내려갔다.

‘저게 뭐지?’

나무숲 사이로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공터 사방으로 나무 사이사이마다 뭔가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이 사방에 쫙 깔려 있었다.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라 구분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상상할 수 있었다. 이렇게 먹잇감을 둘러싸고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녀석들의 정체를!

‘늑대!’

나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지리산에는 곰만 사는 것이 아니구나! 저렇게 우리를 빙 둘러싸고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는 늑대들이 있을 줄이야! 나는 그 반짝이는 눈빛을 노려보았지만 녀석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모닥불을 더 크게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급히 모닥불을 뒤척이는데, 아뿔싸. 큰 나무토막 하나가 무너지면서 모닥불을 덮쳐버렸다. 갑자기 모닥불이 확 줄어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불을 살리려 했지만 불은 갑자기 사그러져가고 있었다. 불이 붙기에는 나무토막들이 너무 컸던 것이다.

‘풀, 마른 풀이 필요해!’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서 바라보는 늑대의 눈빛들! 나는 바닥에 있는 마른 풀들을 마구 손으로 뜯어댔지만 불은 쉽게 타오르지 않았다. 이 불이 꺼지면 나도 늑대들에게 잡혀 먹히겠지. 그 모닥불은 내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친 듯이 사방을 뛰어다니며 마른 풀을 뜯던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 소리를 질렀다!

“야! 야! 일어나! 늑대야 늑대!”

친구들이 화들짝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정신없이 풀을 뜯어 모닥불로 던졌다.

“불 피워 불! 불 꺼지면 안 돼!”

친구들도 당황해서 마구 풀과 나뭇가지들을 주워와 모닥불에 던졌다. 꺼져가던 모닥불이 순식간에 화악 타올랐다. 그제야 친구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뭘 보고 그래?”

“저기 봐. 나무 사이에 반짝거리는 것들.”

친구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 사이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친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안 움직이는데?”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그래도 저렇게 안 움직일 수가 있나?”

잠이 덜 깬 친구가 소리를 꽥 질렀으나 반짝이는 것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나는 한참동안 숲속을 응시했으나 당장 덤벼들지 않는 늑대보다 밀려오는 잠이 더 급했던 모양이다. 친구들은 다시 잠들었고 나는 홀로 외로이 모닥불을 지켰다.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 비명횡사하는 최후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폼 나게 죽고 싶었는데 고작 늑대 밥이라니! 삶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밤이었다.

두려움 속에 긴 밤이 지나갔다. 해가 떠오른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운 줄 처음 알았다. 새벽이 되어 저 멀리 동이 터오를 즈음, 나는 그 반짝이는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었다. -_-;;

우리가 너무 높이 올라와있어서 별이 하늘 위에만 보이는 게 아니라 나무 사이사이로 보였던 것이다. 산에 올라 잠을 자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별이 옆에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별을 보고 그렇게 밤새 소동을 벌였던 것이다.

아침이 되니 친구들의 썩소가 작렬한다. 별을 보고 늑대라고 했었던 거야? 친구들의 비웃음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물이 없어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갈증을 피할만한 무언가를 찾았다. 결국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참치 캔밖에 없었다. 우리는 참치 캔을 따서 먹고 면실유인지 뭔지 모를 액체를 마셨다. -_-;; 그것 외에 우리 주변에 액체라고는 없었다.

우리는 모닥불을 끄고 짐을 짊어지고 다시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길은 점점 좁아져 한 사람이 빠듯하게 지나갈 정도밖에 안됐다. 날은 덥지 물은 없지 길은 좁지 게다가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지...... 이러다 길을 잃고 굶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또 하나의 난관이 나타났다.

길이 막힌 것이다.

우리 키만큼 큰 갈대인지 뭔지 모를 것들 사이로 길이 나 있었는데, 그 앞이 떡하니 가느다란 나무숲으로 막혀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이상의 선택이란 없었다. 나는 그 나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차피 별다른 수는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그 때였다. 나는 그때의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내가 나무들을 헤치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정말 엄청나게 커다란 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본 것이었다. 정말 무슨 시공간을 뚫고 나온 느낌이었다. 내 친구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놀란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그 길을 걸어 올라가던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길옆에 빽빽이 서 있는 나무들을 헤치고 웬 거지 세 놈이 나타나 어리둥절해 하고 있으니 의아할 만도 했다. 나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지나가던 등산객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등산객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뱀사골인데요.”

그랬다. 여기가 뱀사골이었다. 이 넓고 넓은 등산로가 뱀사골 등산로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넓은 등산로를 놔두고 인적도 없는 이상한 등산로에서 헤맸던 것이다. 우리는 환호를 질렀다.

“살았어! 이제 살았어!”

지나가던 등산객들은 ‘저게 웬 미친놈들이야’하는 표정이었으나,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죽다 살아났는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일단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물이었다. 지도를 보니 200미터 정도만 내려가면 샘물이 있었다. 200미터가 대수인가. 나는 가뿐하게 뛰어 내려가 샘물에서 물을 받고 그 자리에서 1리터는 물을 마신 것 같다. 물통 가득히 물을 받아온 우리는 그제야 우리가 어젯밤부터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면을 먹자.”

우리는 그 자리에서 버너를 꺼내고 코펠을 꺼내 물을 끓이려했고 등산객들은 점점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웬 거지 세 놈이 아침부터 길바닥에 앉아서 라면을 끓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 한 두 명의 시선쯤은 감당할 수 있었다.

친구가 간이용 버너를 꺼내 부탄가스와 연결했다. 등산용이라 그런지 단순한 구조였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어째 잘 고정도 되지 않고 어디에 코펠을 올려놔야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불을 켰는데, 불이 환하게 들어오기는 하는데 전혀 뜨겁지도 않고 그냥 밝기만 했다. 친구는 버너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어리둥절해 하고 있고 나는 물이 담긴 코펠을 들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때 배낭에서 물건을 찾던 내 친구가 다가왔다.

“야, 너희들 랜턴 가지고 뭐해?”

그랬다. 그것은 버너가 아니라 랜턴이었던 것이다. 가스를 연결해 밤에 밝게 빛을 내는 랜턴이었던 것이다. 등산을 잘 다니지 않았던 친구가 집에 있는 랜턴을 가져온 것인데, 가스가 연결되는 건 다 버너로 생각했던 것이다.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우리가 버너 위에 코펠을 올리려 하는 걸 보고 신기하다는 듯 힐끔거렸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거지 셋이 길바닥에서 라면을 끓이겠다고 랜턴 위에 물을 올리려고 아등바등 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신기했을까. 이건 뭐 원숭이도 아니고...... 정말 창피해 죽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다른 친구가 가져온 버너가 있어 그 버너에 코펠을 올려 라면을 끓였다. 쫄쫄 굶은 후 먹는 라면 맛은 정말 환상이었다. 우리는 정말 거지처럼 우걱우걱 라면을 먹어댔는데, 사람들이 한둘 정도 지나가면서 쳐다보는 것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런데 등산로로 갑자기 군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행군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 군인들이 어디로 가는 군인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2열로 끝없이 산을 오르는데, 우리는 그 앞에 앉아서 계속 라면을 먹고 있었다. 수백 명의 군인들이 우리가 라면 먹는 모습을 쳐다보며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라면 흡입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기에.

그 이후의 지리산 일정은 비교적 큰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우리는 느긋했는데, 지리산에서 노숙까지 하며 지냈었는데 돌발 상황이 생겨봤자 우리에게는 우스운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추억인데, 그 이후로 내가 삶에 좀 더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으니 충분한 교훈을 얻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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