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외과 인턴으로 일할 때의 일이다. 나는 인턴을 처음 시작한 3월에 신경외과로 배정받아 일을 했었다. 학생 때 수기 연습을 해보기는 했지만 아직 일이 손에 익숙지 못할 때라 3월 인턴은 누구나 고생을 하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신경외과는 전통적으로 업무가 많고 힘들기로 유명했다.

수기도 손에 익지 않은데 일까지 쌓여있을 때의 해법은 무엇일까? 닥치고 열심히 하는 것 밖에는 없다. 무조건 빨리빨리 열심히 해야만 밤 12시에라도 일을 끝낼 수 있는 것이다. 밤 12시에 일이 끝나야 대충 씻고 잠들면 1시 정도가 된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하려면 4시간 정도밖에 못자는 셈이니 참으로 괴로운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아침마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들의 혈액을 채취했는데, 신경외과 주치의는 거의 매일 ABGA(동맥혈 가스분석)를 처방하곤 했다. 일반적인 혈액 샘플과는 달리 ABGA는 동맥혈을 뽑아야 하기 때문에 손목이나 사타구니의 동맥을 찔러 피를 뽑았다. 신경외과 환자들은 하도 동맥혈을 많이 뽑아서 혈관상태가 좋지 못했다. 게다가 아침에 혈액 샘플을 완성해야 의국회의준비를 하고 수술 방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사타구니에서 동맥혈을 뽑곤 했다.



신경외과 인턴으로 일한 지 20일 쯤 지나니까 일이 손에 많이 익었다. 이 때 쯤에는 거의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피를 뽑곤 했다. 중환자실에 길게 늘어서있는 침대 앞에 서서 혈액샘플 오더가 있는지 확인하고 동맥혈이 필요한지 보고 한손으로 환자복 허리끈을 잡아당겨 바지를 내리고 동맥혈을 채취하고 한 손으로는 주사부위를 누르고 또 한손으로는 혈액을 샘플 바틀(bottle병)에 담는 과정이 척척 기계처럼 진행되곤 했다. 솔직히 환자의 성별이나 나이, 질병명 같은 것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신경외과 환자는 거의 의식이 좋지 못했다. 반응이 거의 없는 코마 상태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런 기계적인 혈액채취에도 마음이 편하곤 했다.

그 날도 나는 기계적인 혈액채취에 몰두하고 있었다. 다만 조금 늦잠을 잔 탓에 의국회의 시간에 맞추려면 시간이 좀 빠듯했다. 나는 정신없이 오더를 확인하고 허리끈을 잡아당겨 바지를 내리고 주사바늘을 꽂고 피를 뽑는 과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 정도 환자의 샘플을 끝내고 아무 생각 없이 다음 환자의 허리끈을 툭 잡아당겨 바지를 쑥 잡아당겼다.

순간, 나는 잠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보통 중환자실의 환자들은 속옷을 입히지 않는다. 그런데 내 눈앞에는 분홍색의 예쁜 팬티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나는 멍하니 분홍 팬티를 바라보다가 스윽 눈동자를 돌려 환자의 얼굴을 보았다.

젊은 여자가 누워있었다. 하얀 얼굴에 단정한 모습은 신경외과 중환자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게다가 눈을 뜬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때의 표정은 내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엉덩이 주사를 맞을 때의 표정과 같았다. 주사에 대한 두려움과 속살을 내보였다는 약간의 수치감. 하지만 그 환자의 경우에는 수치감이 훨씬 컸을 것이다. 젊은 남자의사가 다가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지를 훌렁 내려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짧은 순간에 다시 바지를 올리고 사과를 할까 생각했다. 모르고 한 행동이라지만 어쨌든 내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닌가. 몇 초 정도 망설이던 나는 그냥 그녀의 사타구니에서 혈액을 채취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이 순간 내가 바지를 올리고 사과를 하면 어색함에 오히려 그녀의 수치감이 더 커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혈액 샘플링을 마치고 수술 방에 들어갔는데 그녀의 얼굴이 그리고 분홍 팬티의 충격이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술이 다 끝난 저녁, 의국에서 나는 신경외과 선배에게 물었다.

“형, 중환자실에 젊은 여자 하나 있잖아요? 멀쩡해 보이던데 왜 중환자실에 있어요?”

“아, 그 환자? cerebellar ICH(cerebellar intracerebral hemorrhage 소뇌내출혈) 환자야.”

마침 뷰박스에 그 환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선배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뇌CT사진을 톡톡 건드렸다. 선배의 손가락이 있던 곳에는 하얀 혈종이 보이고 있었다. 인턴인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크기의 출혈이었다.

“저 정도 크기면 수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출혈에 비해 환자 상태도 너무 좋고, 환자가 수술을 안 하겠다고 거부해서 중환자실에서 보고 있는 거야. 괜찮을라나 모르겠네. 영 불안해.”

선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뇌CT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일 아침에는 꼭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일 아침에도 ABGA 처방이 있으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손목에서 피를 뽑고 어제 너무 무례한 행동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생각이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는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새벽은 찾아왔고, 나는 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야만 했다. 대충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 후 나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중환자실 앞에 서니 그녀가 떠올랐다. 그래. 오늘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차례대로 혈액채취를 하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가끔 이런 저런 이유로 환자의 자리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기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담당 간호사에게 물었다.

“여기 여자 환자 하나 있지 않았어요?”

“그 환자 새벽에 갑자기 상태 악화돼서 응급수술 들어갔어요.”

날벼락 같은 말이었다. 나는 멍하니 간호사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배의 예감이 적중했던 것이다.

저녁 샘플링 시간에 다시 만난 그녀는 이미 어제의 그녀가 아니었다. 머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져있었고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으며, 팔과 다리에는 이런저런 약병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아직 사과도 못했는데, 그녀는 이제 내 사과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곁에서 한참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아는 환자에요?”

간호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 설명해야 할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간호사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차트를 보니 ABGA 처방이 있었다.

그녀의 허리끈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오늘은 속옷을 입지 않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사타구니에서 혈액을 채취해도 그녀는 그것을 모를 것이다. 나는 잠시 허리끈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손목에 바늘을 꽂고 동맥혈을 뽑았다. 새빨간 피가 주사기에 차올랐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차마 말하지 못한 사과가 입안에 맴돌았다. 주사기를 꽂았던 그녀의 손목을 알코올 솜으로 누르며, 나는 그렇게 한동안 그녀 곁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못다 한 사과를 가슴에 품고 안타까움을 마음에 담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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