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노보드를 좋아한다. 잘 타는 게 아니라 즐긴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굳이 최상급코스 타는 걸 고집한다거나 트릭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무들 사이로 굽이굽이 하얀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국내 스키장에서 시즌권을 산 적이 없다. 의사라는 직업적 신분 때문에 스키장에 자주 가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일단 내가 국내 스키장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말에 국내 스키장을 가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슬로프 전체에 사람이 개미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끔찍한 광경을. 처음 스노보드를 배울 때에는 당연히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사람들 피하는 것이 너무 짜증이 났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나를 덮치거나 다른 사람을 피하려다 내가 넘어지는 경우 아프기도 하고 부상의 위험도 컸다.

그렇게 위험하게 스노보드를 타느니 차라리 시즌권을 살 돈을 모아서 겨울에 단 한번이라도 일본의 여유로운 스키장을 이용하는 게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나는 흔히 말하는 일빠도 아니고 일본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가깝고 한적하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 뿐. 최근 매년 겨울 일본 스키장에 들리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스키장 부상을 꺼려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무주리조트에 아는 동생들과 함께 보드를 타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날따라 일진이 좀 좋지 않았다. 한 녀석이 리프트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리프트권 사고 한 번 타고 내려왔더니 없어졌더란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매표소에 가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반값에 다시 리프트권을 줬다 한다. 그 소동 때문에 우리는 리프트권을 사놓고도 한동안 보드를 타지 못했다. 그 후 리프트로 정상에 올라가서 보드를 타는 동안에도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오늘은 조심해서 타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몇 번 슬로프를 타고 내려온 후, 이번엔 어느 슬로프를 탈까 생각하는데 동생이 커넥션이라는 슬로프를 타자고 했다. 무주리조트의 커넥션은 만선베이스에서 설천베이스로 넘어가기 위한 슬로프로서, 정식 슬로프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베이스 연결을 위한 슬로프 개념이 강했다. 그래서 슬로프가 조금 좁고 구불구불한 편이나 경사도가 낮아서 초보자들이 많이 연습하는 슬로프였다.

나는 예전에 커넥션을 탔을 때 중간 중간 나 몰라라 앉아있는 초보 스키어들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경우가 많아서 탐탁치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타기 싫다고 할 수는 없어 그냥 조심조심 보드를 탔다. 역시 생각대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는 멈췄다 달렸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내 앞으로 동생이 쓩 하고 지나갔다. 사람들 사이를 슉슉 잘도 빠져나간다. 저 녀석 너무 빨리 달리는 거 아냐?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별일 있으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슬로프가 꺽여진 지점에 도달하니 녀석이 바닥에 앉은 채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보드를 신은 여자애 하나가 널브러져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동생 앞에 멈춰 섰다.

“야,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박았어요. 아우.......”

동생의 설명은 이랬다. 자기가 막 타고 내려가는데 저 앞에 여자애가 정상 쪽을 바라본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더라는 것이다. 피해갔어야 하는데 옆에 달리는 사람 때문에 피하지 못했고 그냥 보드를 멈춰 서려 하는데 달리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여자애와 부딪혔다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머리와 머리가 부딪혀서 여자애가 쓰러진 것이었다.

나는 여자애를 살펴보았는데,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눈을 껌뻑껌뻑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기요, 괜찮아요?”

여자애가 뭐라 대답을 하는데 횡설수설이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야, 패트롤 불러. 패트롤.”

패트롤이 달려왔고 그때까지도 여자애는 몸을 잘 일으키지 못했다. 겨우 몸을 추스른 그녀에게 패트롤이 물었다.

“괜찮아요? 내려갈 수 있겠어요?”

스키장 하단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영 불안했다. 나와 동생은 그녀 뒤쪽에서 조심조심 보드를 타고 내려갔다.

“의무실부터 가죠.”

우리는 그녀를 데리고 의무실에 갔다. 의무실에는 젊은 의사가 있었다. 나도 의사지만 그곳에서 의사 티를 내는 건 어쩐지 그 젊은 의사에게 불편감을 줄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의사가 그녀를 진찰하더니 우리에게 와서 말했다.

“기억을 잘 못하는 것 같고 보이는 것도 이상하다고 하니까 큰 병원 가서 CT를 찍어보시는 게 좋겠네요.”

눈앞이 캄캄했다. 어째 일진이 안 좋더라니! 내가 이래서 커넥션 슬로프가 싫었던 모양이다. 동생과 나는 조금 상의를 해보았는데, CT를 찍을 수 있는 병원도 한 시간은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담당의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몰래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경학적 검사라면 신경과 의사를 따라올 사람은 없으니까.
 
“저기요, 누구랑 같이 왔어요”

“아, 그게...... 잘 모르겠어요. 친구 전화번호는 어디 있을 텐데.”

휴대폰에서 친구 전화번호를 찾는 모양이었다.

“숙소는 어디에요? 동료들은 어디 있나요?”

“숙소...... 기억이 안나요. 다른 사람들, 아마 스키 타고 있을 거예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숙소가 어딘지도 기억이 안 나고 같이 온 사람이 누군지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단기적인 기억상실? 나는 그녀 눈앞에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거 하나로 보여요?”

“아뇨, 흐릿하게 두개로 보여요.”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다. 머리를 부딪힌 후 두개로 보인다면 그건 뻔하지 않은가. 부딪힐 때의 충격으로 안와골절 등 눈동자 주위에 물리적인 제약이 생겨 눈동자가 잘 안 움직이거나, 뇌에 출혈 같은 게 생겨 안구운동신경에 문제가 생겼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어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단기 기억상실까지 있으니 이건 필경 뇌출혈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동생을 돌아봤다.

“야, 이거 진짜 CT 찍어봐야겠는데.”

동생의 얼굴빛이 참담해졌다. 놀러왔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게다가 1박2일 일정의 시작이 이렇게 되었으니.

일단 가까운 병원이 어디인지부터 알아봐야 할 상황이었다. 이 근처에 병원이 뭐가 있더라.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의사는 환자를 많이 보다보면 ‘감’이라는 것이 생긴다. 증상의 나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인데, 내 의사로서의 ‘감’이 어째 그녀의 뇌출혈에 의심을 품고 있던 것이다. 좀 멍하고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그녀의 의식은 뇌출혈 치고는 너무나 명료했고, 팔다리 움직임도 원활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숙소가 어딘지 정말 기억 안나요?”

“네. 잘 몰라요.”

“이름은 알고 있었죠? 그런데 기억을 못하신다는 거죠?”

“아뇨, 저 그냥 갑자기 끌려와서 숙소 이름을 못 들었어요.”

황당한 일이었다. 그녀는 숙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숙소 이름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냥 무작정 친구에게 끌려왔다는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시간이 늦어서 바로 옷 갈아입고 오느라 숙소 이름을 못 들었다는 것이다.

“그럼, 같이 온 사람들은 이제 기억나요?”

“친구 빼고는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요?”

자신을 끌고 온 친구가 아는 사람들이라서, 오늘 초면이란다. 게다가 마찬가지로 급하게 나오느라 이름을 못 외웠단다. 이름을 모르니 기억을 할 리가 있겠나. 점점 허탈감이 몰려온다. 나는 그녀 눈앞에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거 아직도 두 개로 보여요?”

“이제 하나로 보여요. 아까는 이쪽 렌즈가 돌아갔었나봐요.”

부딪힌 충격으로 한쪽 눈의 렌즈가 돌아가면서 흐릿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내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그녀의 동료가 왔고 그녀는 꾸물꾸물 보드부츠를 신고 있었다.

“저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갈게요.”

그녀는 친구와 함께 의무실을 나서려 했다. 우리가 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연락처는 주고 가셔야죠!”

“연락처는 왜요?”
 
“다쳤으니까, 혹시 시간 지나고 증상이 나빠질 수도 있잖아요.”

그녀는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더니 연락처를 남기고 의무실을 나섰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폼이 다시 보드를 타러 가는 모양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동생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형, 어떡하실래요? 더 타실래요?”

“글쎄. 너는?”

“...... 그냥 들어가서 맥주나 마시죠.”

 녀석은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갑자기 머리에 썼던 비니를 벗으며 이마를 내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냐?”

녀석의 이마에는 빨간 자국이 있었는데, 비니의 옷감 자국이 그대로 피멍이 되어 있었다. 부딪힐 때의 충격으로 옷감 무늬가 이마에 새겨진 것이었다.

“나 진짜 아파 죽을 거 같았는데 아까 저 여자애가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서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있었어. 왠지 배신감 느껴지네.”

녀석과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날 저녁은 보드를 안타고 그냥 숙소에 들어가 술을 조금 마셨다. 다음날 그녀에게 전화를 해봤더니 ‘전화 왜 하셨어요?’라고 오히려 우리에게 되물었다. 목소리가 쌩쌩한 걸 보니 건강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후로 보드를 탈 때 항상 안전장비를 챙긴다. 무릎보호대와 헬멧은 물론이요, 지난 시즌에는 상체보호대까지 샀다. 겨울스포츠도 좋지만 우선 안전부터 챙겨야할 테니까. 이게 다 스키장 그녀와의 아찔한 만남이 내게 남겨준 교훈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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