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것은 2000년 여름경이었다. 의약분업 시행에 따른 의약계의 마찰이 심화되고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져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결국 의약분업은 시행되었고,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았는지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또한 그러한 일들이 옳은 일이었는지 그른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내가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순간, 내가 새내기 의사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을 할 뿐이다.

2000년은 나에게 매우 뜻 깊은 해다.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밀레니엄의 시작이었고, 또한 그토록 염원하던 의사가 된 해였다. 그리고 절대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인턴시절로 얼룩진 해이기도 했다.
 
인턴으로 수련생활을 하다 보면 유난히 궁합이 맞지 않는 과가 있는데 나에게는 정형외과가 바로 그 악몽의 주인공이었다. 정형외과의 험악한(?) 분위기도 잘 적응되지 않았고,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사소한 잘못으로 치프 레지던트에게 찍히는 바람에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오죽하면 그 힘들다는 정형외과 1년차 레지던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보름 남았다! 보름만 참아라!’라고 말했을까.

그런 와중에 의약분업 사태에 따른 전공의 파업이 이루어졌다. 실상 파업이라는 것이 상당한 무리수였고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 했겠지만, 지옥에서 빠져나온 인턴의 마음이 어찌 그리 경건할 수만 있겠는가. 누구보다도 쾌재를 부른 것이 바로 나였다. 전공의 파업이 옳은 일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불편을 겪은 환자들을 생각하면 사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당시는 나야말로 너무 힘이 들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파업을 했다고 해서 마냥 노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의약분업 시행의 문제점에 대해 홍보하는 전단지를 여기저기에 뿌리는 임무가 주어졌는데, 그 힘든 인턴 잡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경비아저씨를 따돌리며 아파트 여기저기에 전단지를 붙이러 다녔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러다 걸려서 욕을 한 무더기 얻어먹은 기억까지도.

파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선생님을 뵙지 못했을 것이다. 좀 더 많은 의사들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우리는 개업가를 전전해야 했다. 개업의 선생님들을 뵙고 전공의들이 파업에 임한 이유를 말씀드려 지지를 얻고자 했는데, 먹고사는 일이 달린 개원의 선생님들께 협조를 구하는 것은 여간 송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주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이 개인병원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나에게 배당된 병원의 목록을 체크하던 중, 나는 시내 조그만 골목에 있는 이비인후과를 하나 찾게 되었다. 도서관 옆에 있던 병원인데, 나는 그렇게 도서관을 다니면서도 이 병원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시립도서관이 꽤나 낡은 건물이었기에 그 옆에 있는 병원조차도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환자는 하나도 없고 나이든 간호사 한 분이 계셨다.

“실례합니다. 혹시 원장님 계십니까?”

병원 안쪽의 작은 방에서 선생님이 나오셨는데, 어림잡아 보기에도 칠순정도 되어 보이셨다. 정말 의학계의 대선배님이 아닌가. 하지만 병원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해보였다. 진료기구들은 모두 수십 년은 된 듯한 골동품들이었고, 병원 건물도 언제 무너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허름했다. 이렇다 보니 환자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의약분업에 대해 설명을 드리는데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셨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다기보다 잘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최대한 정중하게 설명을 드리고, 파업을 지지한다는 서명을 받은 후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을 나서며 친구들과 ‘이런 병원이 망하지 않고 아직도 진료를 하는구나’ 하며 신기해했었다.

전공의 파업의 종료와 함께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인턴 생활은 바빴으나 어쨌건 무사히 인턴을 마치고 신경과 전공의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공의 2년차가 되어 중환자실 업무를 맡게 되면서 일반병실의 환자로부터 손을 떼게 되었고, 새로 들어온 1년차가 그 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신경과장님의 회진 때에만 같이 회진을 돌면서 일반병실 환자를 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뇌경색으로 입원하신 어르신이 한 분 계신데 어째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았다. 회진 도는 내내 누굴까 누굴까 골똘히 생각해보니, 이럴 수가. 그 때 그 선생님이 아닌가.

1년차를 시켜 확인해보니 역시 내 기억이 맞았다. 그때 그 노의사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하신 것이었다. 뇌 MRI를 살펴보니 병변 크기가 그리 크지 않고, 마비도 심하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찾아가서 인사를 드릴까 했으나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그저 1년차 선생에게 ‘대선배님이시니 잘 해드려라’ 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증세는 악화되지 않았고, 그 후 며칠이 지난 후 재활치료가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우리 과 입원명단에서 그 분의 성함이 없어졌고, 당시 나도 꽤나 바빴기 때문에 재활치료를 위해 재활의학과로 전과가 되었는지 아니면 그냥 집으로 퇴원하셨는지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쨌든 치료가 잘 되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두 번째 만남은 끝이 났다.

세 번째 만남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1년차가 오프를 나가는 날은 내가 당직을 서야 했는데, 당직을 설 때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 바로 응급실 콜이었다. 응급실 콜만 없으면 당직을 서도 아주 맘 편했는데, 응급실 콜로 삐삐에 불이라도 나는 날이면 밤을 새다시피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좀 쉬어볼까 하는데 역시나 삐삐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응급실 번호를 확인한 후 나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했다. 환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응급실에 가서 환자를 봤다. 진료를 다 한 후 응급실을 나서려는데, 중환자용 베드에 누군가가 삽관을 한 채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선생님이었다. 그분이 입에 튜브를 꽂은 채 누워계셨다. 온 몸에 이런저런 기구와 주사들이 매달려있었고, 모니터의 심박수는 상태가 좋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응급의학과 친구에게 물었다.

“저 환자, 왜 저래? 병명이 뭐야?”

친구가 차트를 뒤적이다가 환자를 흘긋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냥 우리 과에 뇌경색으로 입원했던 환자거든. 재발한 거야?”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DI(drug intoxication;약물중독)로 왔는데.”

“DI?"

“응. 농약을 마셨나봐.”

나는 뭔가가 머리를 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친구가 그 분의 차트를 뒤적이더니 응급실 차트를 보여주었다.

“너희 과에서 치료받고, 재활의학과에서 재활치료 하다가 퇴원하셨던 모양이네. 원래 의사셨다며? 퇴원한 다음 진료하시던 병원을 정리하기로 했는데, 마지막으로 그 병원에 한 번 다녀온다고 하고 외출한 후 연락이 없어서 병원에 찾아가보니 쓰러져 있더래. 옆에는 농약 병이 있었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분은 그 후 내과에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농약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셨다. 나와는 단 세 번의 만남만 있었을 뿐,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 분의 모습은 한동안 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그 분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뇌경색까지 오고 병원영업을 그만두게 된 시점에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회의를 느꼈던 것일까. 왜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것일까. 자신이 평생 동안 지내왔던 병원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하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요양병동을 담당하면서 어르신들이 쉽게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좋은 시절은 다 지나고 이제 제대로 일도 못하고 먹고 살 수도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폐를 끼치게 되면, 이제 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 분도 그러셨을까. 이제 뇌경색이 와서 한쪽에 마비가 올 정도로 늙었으니, 사는 것이 덧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일까. 의사로서 살아왔는데 더 이상 환자를 볼 수 없다면 여생도 의미가 없다고 느끼셨을지 모른다.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폐를 끼치느니 깨끗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한때는 의사로서 최고의 지위와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분의 쓸쓸한 마지막을 보며 나는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과연 나는 저 나이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 과연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던가.......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살아가며 천천히 풀어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많은 생각을 남겨주셨던 선생님.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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