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 마케팅에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라는 말이 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성공한다는 뜻이다. 의료계라면 환자를 진료할 때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라고 말할 것이다. 환자가 진료와 치료를 받을 때 어떤 심정일지를 깨달아야 인술(仁術)을 베풀 수 있다는 뜻이리라.



의과대학 교육과정 중 ‘환자체험’이라는 것이 있었다. 환자가 받는 시술들을 실제로 의과대학생들이 체험하면서 환자의 고통과 불편한 심정을 느껴보도록 하는 취지였다. 학생들이 받는 시술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난이도가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었다. 나는 한쪽 다리에 스플린트(splint부목)를 대고 목발을 짚은 후 한 시간동안 다리골절환자체험을 했다. 말이 환자체험이지 이정도야 놀이에 가까웠다. 하지만 L-튜브(Levin tube경비위관), 흔히 코줄이라 부르는 시술을 받은 친구는 눈물콧물을 쏟아야 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하는 시술이라도 환자는 힘들어할 수 있으니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교수님들의 뜻 깊은 배려였다.

진료를 하다보면 그저 이론에 휩싸여 환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환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그저 무덤덤하게 검사를 처방하고, 시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냉정해져야 하는 것이 의사의 숙명이라지만, 지나친 냉정은 곤란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정신과 선생님께서는 법이 허용하는 한 모든 약을 직접 드셔보신다고 한다. 환자에게 줄 약인데 어떤 효과가 있는지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직접 몸으로 느껴봐야 환자에게 약을 줄 때에도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이지 않는가?

갑자기 천사의사라도 된 것처럼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다. 요양병원 회진을 도는데 간호사가 귀띔을 했다. 할머니 한분이 자꾸 헛소리를 하신다는 거다. 자꾸 벌레가 기어 다닌다고 하루 종일 허공에 손을 휘젓고 있단다. 워낙에 환시가 좀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병실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께서는 허공을 바라보며 뭔가를 붙잡는 듯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 손을 잡으며 물었다.

“할머니, 지금 뭐하세요?”

“벌레, 벌레가 많어. 저거 다 잡아야 하는데. 어째.”

“뭔 벌레가 있다고 야단이세요.”

할머니에게 핀잔을 주던 나는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 흘긋 허공을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보이는가. 저 기괴한 모습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최근 천장 마감재로 저런 무늬의 석고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냈었는데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벌레처럼 생기기는 했다. 왜 저런 구멍 숭숭 뚫린 디자인을 그대로 남겨두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병원 천장으로는 적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신 어르신들 대부분은 병상에 누워서 지내시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사지가 마비되어 그저 천장만 바라보고 계셔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저런 흉측한 무늬를 1년 내내 24시간 바라봐야 한다면? 그것만한 고문이 있을까?

나는 그날 이후 할머니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생겨 어떻게든 천장의 무늬를 바꿔주고 싶었다. 병원직원에게 천장 보드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답변은 당연히 ‘No.’였다. 사실 우리 요양병원은 매년 적자상태다. 의료원에서 위탁경영을 하고 있는데 병상이 84병상밖에 안되다 보니 매년 1억 이상 적자가 난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들여 천장을 싹 바꿔달라는 요청을 한다는 것은 부탁하는 입장에서도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적자나 해소하고 그런 부탁을 하소.’라는 핀잔을 듣기 딱 좋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요양병원을 개원하게 되면 나는 천장을 다른 마감재로 깔끔하게 처리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긴 하는데, 과연 내가 요양병원을 개원할 날이 언제 올지, 혹은 그 날이 오기는 할지 의문이기는 하다.

며칠 전에는 휴일에 특별한 약속이 없어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던 적이 있다. 사지마비로 못 움직이는 환자는 어떤 기분일까 싶어 하루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어보자 했는데, 채 한 시간도 되지 못해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다리도 근질거리는 것 같고, 얼굴 위로 날아온 파리도 자꾸 신경 쓰이고 머릿속도 가렵고 하여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 환자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숙연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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