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꽤 밀려있었다. 나는 바쁘게 환자분께 증상을 묻고 설명을 하고 처방을 내며 그렇게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여느 다른 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여유로운 한때였다.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고 나는 그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어지럼증이 심해졌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푸념에 어떻게 어지러운지 얼마나 자주 증상이 나타나는지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문득 눈을 들어 환자를 쳐다보는 순간, 세상이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형용할 수 없는 낯선 감각이었다.
 
‘뭐지? 이 느낌은?’
 
멍하면서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웠으나 진료를 중간에 그만 둘 수는 없기에 환자의 이야기를 계속 들으며 그 증상을 차트에 적으려는 순간,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볼펜 끝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구멍이라도 난 듯 볼펜 끝의 시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또한 볼펜 끝이 놓인 차트도 사라져버렸다. 마치 내 앞에 작은 블랙홀이라도 생긴 듯, 동그랗게 태워버린 것처럼 내 시야의 한가운데가 뻥 뚫려버린 것이다. 나는 당황해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한참 눈을 껌벅이던 나는 진료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환자의 증상을 차트에 쓰려했으나 볼펜 끝이 보이지 않으니 글자가 보일 리 없다. 다만 몇 글자를 쓰고 옆으로 옮겨가면 내가 썼던 글자들이 그제야 검은 블랙홀 옆으로 하나 둘씩 나타나게 된다.
 
눈을 깜박이며 환자를 쳐다보았다. 아뿔싸. 환자 얼굴이 보이지를 않는다. 눈을 보면 눈이 안보이고 코를 보면 코가 안 보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 이상한 나라의 권선생이 맞겠군. 완전한 패닉상태다.
 
겨우겨우 환자의 진찰을 마치고 간호사에게 다음 환자 못 들어오게 하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나 스스로를 진찰해봤다. 왼쪽 눈을 가려도 안보이고 오른쪽 눈을 가려도 안 보인다. 양쪽 눈이 동시에 고장 날 이유는 없다. 결론은 하나다.
 
“뭐야 이거, 뇌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내 눈에 암점(scotoma)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시야 한가운데에.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일단 양측성이니 눈의 문제는 아니겠지 싶어 영상의학과로 달려갔다. 급하게 영상의학과 과장님께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외래환자를 동료 과장님께 부탁한 후 바로 뇌 MRI 촬영을 시행했다.
 
MRI를 찍는 내내 조마조마했고 수백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도대체 왜 이런 증상이 생긴 걸까. 아직 뇌졸중이 오기에는 이른 나이인데다 술담배도 안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증상이 찾아온 걸까. 걱정 끝에 검사가 끝나고 판독을 해 보니 결과는 정상이었다.
 
일단 검사가 정상이니 다행이지만 원인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왔다. 터벅터벅 걸어 진료실로 돌아와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뭐지? 왜 이런 거지? 진료실에 앉아 도대체 이 증상이 뭘까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데 동료 신경과 선생님께서 들어와 괜찮냐고 물으셨고, 나는 외래환자를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그 동안의 증상과 검사결과를 주절주절 말해댔다.
 
“도대체 왜 이런 거죠? MRI는 정상인데…… 아, 이젠 머리까지 아프네요.”
 
고개를 갸웃하던 선생님은 툭 던지듯 내게 말했다.
 
“그거, 편두통 아니야?”
 
선생님의 말에 나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내 머리 속에 편두통의 진단기준과 증상들이 빛처럼 스쳐지나갔다. 편두통이 오기 전에 전조증상이 나타나는데 주로 시야의 장애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암점이나 왜곡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그 후 울렁거리는 구역 및 구토, 두통이 동반되게 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속도 좀 안 좋았던 것 같다. 신경을 써서 머리가 아팠던 것이 아니라 편두통 때문에 아팠던 것이다.
 
그렇다! 내게 생겼던 암점은 편두통의 전조증상이었던 것이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인데다 두통이 나타나기 전이었으니 편두통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그 난리를 쳤던 것이다.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나오자 일단은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너무나 큰 창피함이 몰려왔다. 그동안 그렇게 많이 보아왔던 편두통 증상을 알아채지 못하고 MRI까지 찍은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게다가 편두통의 전조증상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막상 나 자신조차도 이상한 나라의 권선생이 된 게 아닐까 생각했으면서도 편두통을 떠올리지 못했다니…… 처음 나타난, 두통이 나타나기 전 전조증상만으로 편두통을 진단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전문의로서 진단이 늦은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다.
 
새삼스럽게 나를 찾아왔던 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편두통 증상을 나에게 호소할 때 나는 그저 편두통의 진단기준에 부합되는지 아닌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는 크게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 증상을 겪어보니 증상자체의 경중이 문제가 아니었다. 병의 원인을 모르는 두려움 자체가 너무나도 커다란 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후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건강 상담 글을 읽어보았는데, 질문을 한 학생의 증상도 전형적인 편두통 증상이었다. 갑자기 눈앞의 시야가 이상해지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아프고 토했다면서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동병상련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MRI까지 찍으면서 난리법석을 떨었던 나의 경험이 생각나 그 학생의 심정 또한 어떠할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 자리에서 편두통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함께 지금 겪고 있는 증상은 편두통일 가능성이 높으니 큰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똑같은 증상을 겪었다고 답해주었다.
 
몇 시간 후 확인해보니 내 답변에 댓글이 달렸다. 그동안 뇌종양 같은 큰 병이 아닐까 싶어 너무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했었는데 나의 답변이 너무 큰 힘이 되었다며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증상들은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환자의 불편함보다 그저 증상의 유무만을 확인하다보니 더더욱 남의 일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남이 보기엔 사소해 보이는 증상도 본인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일이 모두 그렇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똑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남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씀씀이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항상 미덕으로 남겨져야 할 것이다. 학생의 댓글을 읽는 나의 입가에 계속 미소가 떠올랐다.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기억은 아마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그 학생도 아마 걱정을 덜고 편히 잠을 잘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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