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환자였다. 이제 갓 신경외과 전공의에 입문하여 처음으로 받아 본 뇌종양 환자가 그 아저씨였고, 사망선언의 순간까지 그 옆을 지키며 돌봤기 때문이다. 주로 병동에서 일하는 1년차 특성상 지난 7개월의 시간동안 아저씨의 가족들과도 많이 친해질 수 있었고, 일반적인 의사-환자 관계를 넘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각별한 사이였다. 아저씨의 상태가 악화될 때마다 나는 자세한 상태설명과 함께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가족들을 위로했고, 한참 병원을 사직하는 문제로 힘들어 했을 때 아저씨의 가족들은 내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도 했다.

 특히 아저씨의 부인인 아주머니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잘(생긴)'선생님이라며 나중에 꼭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될 것 같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호두과자를 좋아하지만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못먹는다는 나의 장난스런 말 한마디에 몇일을 호두과자만 사다준 적도 있었고, 일에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내 손을 부여잡고 나를 위로해주기도 했다. 그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고자 아저씨의 상태가 한참 나뻐지던 6월 몸은 피곤했지만 하루에 한시간은 꼭 아주머니와 마주앉아 오래전 아주머니 부부의 행복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위로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저씨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만 되어갔다. 물론 아저씨는 입원 당시부터 1년을 넘기기 힘들거라 다들 예상했었다. 뇌종양 중에서도 가장 예후가 좋지 않은 교모세포종이었고 이미 여러 곳으로 전이된 상태였으며 종양 주변으로 출혈까지 동반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복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중환자실에서 수십일을 보내다 다시 병동으로 나와서 3개월여 시간을 보내며 회복되는가 싶더니 한달전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되면서 coma 상태에 빠졌고, 급기야 금주 수요일 오전 그 길었던 생을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감했다. 심박동수가 늘어지며 마지막을 힘겹게 견뎌내더니 곧바로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눈물을 흘리며 아저씨의 손을 부여잡고 편히 가시라는 말을 하는 순간, 기적처럼 모니터에는 flat한 리듬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후 DNR을 제출했던 가족들의 뜻에 따라 1분여 뒤 사망을 선언했다.

 장례식은 가족의 뜻에 따라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졌다. 금요일이 발인날이라 그 전에는 꼭 한번 들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새벽 비록 오프는 아니었지만 윗년차 선생님의 양해를 구한 후 비오는 새벽 도로를 뚫고 방금 전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운전하는 내내 지금은 관 속에 고이 잠들어 있지만,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살아 숨쉬고 있는 그분과 힘들어 하는 아주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참으로 무거웠다. 식장에 들어서 국화꽃 한송이와 함께 아저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아주머니의 두손을 꼭 부여잡고는 힘내라는 말을 전했다. 1년차 사정은 자기가 가장 잘 아니까 밥 한끼는 꼭 챙겨 먹고가라는 아주머니의 당부에 이미 늦은 저녁 식사를 한 상태였지만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사실 아저씨가 중환자실로 들어간 이후에는 아주머니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아저씨 상태를 보면서, 아주머니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 대접해야 겠다고 마음 속에만 담아둔 지난 날이 무척이나 후회가 된다. 하루는 커피를 사왔지만 아주머니를 찾지 못해 병동 간호사에게 그냥 줘버린 일도 있었는데, 그때 아주머니를 조금만 더 찾아볼껄 하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아쉬움에 빠졌다.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다시 빗길을 뚫고 조용히 병원으로 들어와 지난 수개월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회진리스트에 있었던 아저씨의 이름을 내일자 명단에서 지우는데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나를 감싸안았다. 병동 일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늘 아주머니가 머물렀던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을 둘러보았고, 늘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던 아주머니의 얼굴을 이제는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갑자기 슬퍼졌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는 오늘, 아마 내게는 쉽게 잠들기 어려운 밤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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