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부족해서 환자가 제때 치료받지 못한다는 교수님의 말이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 않았던 그리고 헌혈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학업 평가 점수를 감하겠다는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의 말이 참으로 야속했던 시절이 있었다. 학생회 시절 몇몇 간부들과 주도하여 사랑의 헌혈 행사를 벌인 적도 있었지만, '사랑의 나눔'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이유 외에는 헌혈의 중요성이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았었다. 환자에게 직접 피 처방을 내리고 급할 때는 아이스 백을 들쳐매고 수술방 앞까지 뛰어다니는 인턴과 1년차 생활을 보내는 요즘도 나는 헌혈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랐다. 의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무척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250ml 한 파인트의 혈액이 환자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은 최근 일이었다. 간성혼수에 이은 뇌출혈로 쓰러진 한 40대 남성은 내원 당시 혈소판 수치가 5000(정상은 혈소판 수치는 15만-40만)개였다. 대개 혈소판 수치가 2만개 이하면 외상이나 충격이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출혈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에 응급으로 혈소판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혈소판 여섯 파인트를 응급으로 처방했다. CT에서 보이는 출혈량도 상당했기에 혈소판 수혈이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출혈량은 급격히 늘어날 것이 불 보듯 뻔했고, 간성 혼수에 기왕력은 더욱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30분 후 혈액원에서 전화가 한 통화 걸려왔는데, 전국적으로 당일 혈액 수급이 부족하여 혈소판을 내일 오후나 보내 줄 수 있다는 절망적인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주변 병원 몇곳에도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 환자에게 수혈 될만한 여분의 혈액은 없었고, 그 환자는 저혈소판증에 대한 치료를 받지 못한채 방치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환자의 의식은 deep drowsy(기면, 깊이 졸린 상태)에서 coma(혼수) 상태까지 빠르게 저하되었고, 뒤늦게 혈소판을 수혈했지만 이미 악화된 환자의 상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인공 호흡기와 승압제에 목숨을 부지한 채 숨이 끊길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참으로 황당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몇몇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의 혈액 부족량은 점차 심각한 수준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요량과 공급량이 같은 2002년을 기점으로 혈액공급량은 매년 감소하여 올해는 혈액 수요량 약 400만 유닛 중 25% 정도인 91만 유닛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되었으며 2030년에 가서는 수요량이 약 500만 유닛인데 반해 부족량은 50%가 넘는 약 285만 유닛에 이를 것이라는 한 연구 결과는 앞으로 다가 올 '혈액대란'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오래전 헌혈과 관련하여 봉사 이야기를 블로그에 소개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헌혈은 내게 타인과 나누는 봉사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었다. 하지만 생명을 다루는 의업에 종사하는 한사람으로서 헌혈은 지금 내게 '나눔과 봉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따뜻함, 나눔, 사랑, 희생 등으로 포장했던 지난날의 헌혈이 내 가슴이 따뜻해지기 위한 충분조건이었다면, 지금은 봉사나 사회공헌이 아닌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고 생존시키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어버린 셈이다.

 수혈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늦가을과 겨울, 혈액 보유량이 모자라서 수술이 연기되는 사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특히나 응급수술도 많고 수술 중 실혈량도 제법되는 신경외과로서는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수술을 통해서 회복 가능한 누군가가 단지 피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처치도 받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부디 1초간의 내 아름다운 찡그림이 수십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슈퍼맨의 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에 참여하여 위와 같은 안타까운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