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방송되었던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밀풍 리농 편을 보면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를 감출 길이 없었다. 인터넷 광고랍시고 간 이식 수술 후 건강을 되찾았던 간암 환자의 사례나 약을 먹고 호전 되었던 파킨슨 환자의 사례의 실체가 밝혀지지면서 한번 분노했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는데 두번 놀랐으며, 그런 그에게 환자를 끊임없이 소개하는 인간들이 바로 의료법상 합법적인 의료행위가 보장된 한의사들이라는데 세번 까무라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의학도 학문도 그렇다고 종교도 아닌 사기였으니 말이다.

 끝까지 옳다 주장하는 밀풍 리농의 의식 치료를 검증을 하려면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검증 밖에 없다. 그런데 과학적 검증이 시행되면 리농의 이론은 파탄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방송에서 소개된 제자들과의 담화에서 보여지듯 그 정체성 자체가 깨지기 때문이다. 그가 제작진이 그토록 권고하는 검증을 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관념은 관념을 부른다. 그리고 관념으로 구성된 세계관은 이와 같이 증거를 부정한다. 만약 과학적 증거를 하나라도 인정하면 관념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파탄에 직면한다. 그래서 결국 끝까지 관념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비합리성, 비과학성, 비논리성이 관념적 세계관을 이루는 핵심이다. 관념으로 실체를 규정하면, 이와 같이 결국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가 방송에서 끊임없이 주창하던 형이상학적인 의식치료를 형이하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이와 일맥상통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의식치료는 철저히 대중의 신비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초능력 현상을 믿는 대중들이나 신기한 초능력이나 비과학적 현상을 믿거나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 있게 전달된다. 의학과 과학의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가 존립할 수 있는 토대이며, 생존의 근거이다. 하지만 과학적 검증이 시작되면, 시작 자체로 이러한 신비감이 사라지고 치료 효과의 허구가 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론이 더 이상 신비롭지가 않게 된다는 것은 곧 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는 자살 행위이다.

 리농과 같은 관념이 현실을 지배하면 곧 도그마가 된다. 또한 리농과 같이 관념적인 인간에 대한 해석으로 인간의 생명을 다룬다면 이는 곧 살인과 다를 바가 없다. 간경화 환자의 의학적 치료를 중단하게 함으로 결과적으로 살인에 이르게 한 그의 이론은 의학에 있어서의 실수와는 달리 관념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이론이 관념에 불과한 이유는 다시 말하면 증거 없이 믿으라고 하기 때문이다. 과학에도 관념주의, 사이비, 돌팔이에 대한 기준이 있다.

 자연 현상에 대해 증거 없이 믿으라고 하면 관념주의이다. 믿음과 종교는 증거 없이도 가능하다. 아니 교부철학에서 말하듯이 신앙은 믿을 수 없기에 믿는다. 허나 과학은 다르다. 과학을 가장 짧게 정의하면 증거와 증명 없이는 믿지 않는 체계적 지식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의심한다. 모든 것을 의심한다. 과학은 도그마, 독단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 다른 과학을 주장하면 증거 없이는 믿지 않는 과학과는 필연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고, 과학과 반대되기 위해서, 혹은 또 다른 과학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증거 없이 믿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증거와 증명을 허용하면, 다시 말해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진실을 가려내기 시작하면 리농은 무너질 수밖에 없으며, 그의 이론은 대상과 방법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다.

 물리학에서 역학의 법칙에 의하면 역학 에너지 F= mv2/2이다. 이런 물리학의 법칙을 기독교 교리에 적용하여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하자. ‘성령의 힘은 성령의 무게 곱하기 성령이 움직이는 속도의 제곱의 반이다.’ 이런 주장은 물리학도 신학도 아니다. 관념을 실체인 자연 법칙과 혼용하면 이런 괴이한 주장도 가능하다. 혹 비유로는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지만 역학의 법칙을 신학의 성령의 힘으로 설명해도 마찬가지로 학문이 아니다. 관념에서 유래한 점술, 혹은 수양서인 주역이나, 음양오행, 도로 자연의 법칙인 질병을 해명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 리농의 의단원은 의학도 종교도 아닌 사이비라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의 환자들을 매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을테고, 더군다나 법적으로 의료행위가 보장된 한의사들이 그를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허나 어디 그들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과학적 기반이 전혀없는 의단원과 그의 의식치료, 나아가 사실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웹상의 치료 성공담만 믿고 그를 찾고 의지하는 사람들 또한 문제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로 옷을 제대로 입을 수는 없다. 질병의 치료도 마찬기지다. 그래서 반성이 필요하고, 의심이 필요하다. 나는 이번 방송을 굳이 리농에만 국한하여 생각하고 싶지 않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예를 들어 정치, 경제, 사회, 대중 문화적 현상이나 조직폭력, 무당, 굿을 비롯하여, 인간과 자연, 상상과 환상 등 모든 실제, 혹은 상상만의 존재 등 역시 모두 의심과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혼돈한 세상 속에서 그 어떠한 것이든 처음의 전제를 의심하는 반성, 근본을 의심하는 반성, 그리고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춘추전국 시대 신의라 불린 편작을 소개했던 열자의 글귀를 소개하며 마칠까 한다.

“편작이 노나라의 공호와 조나라의 제영의 병을 고치는데 한명은 기가 세고, 한명은 약해 두 명의 심장을 바꾸었다, 서로의 집에 갔는데 집안 식구들이 못 알아보더라. 즉 공호의 심장을 가진 제영은 자기가 공호인줄 알고, 반대로 공호는 제영인줄 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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