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병원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을 꼽으라면 바로 '보호자'란 단어가 그 첫째일 것이다. 때론 내게 생존을 주고, 감동을 주고, 보람을 주는 감사한 존재지만 돌아서면 욕설과 비난을 서슴지 않으며 때론 폭력과 핫라인까지 행사하는 야누스의 두 얼굴과 같은 살 떨리는 존재들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때론 우군이 되기도 하지만 환자의 회복 속도가 더디거나 문제라도 생기면 한순간에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달면 삼키고 써도 삼켜야만 하는 그들과 이제 갓 초년병 의사로서 최전방에서 마주하는 일은 항상 어렵다.    

 특히 시간에 기고 과다한 업무에 기는 탓에 체력이 이미 바닥을 치고 있는 내게 그들과의 전쟁은 대부분 내게 손해와 패배만 안겨줄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되도록 보호자들과 다투지 않으려 노력 중이지만 시간적 그리고 정신적 여유가 부족한 내게 그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기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다. 얼마 전에도 '술 마신 상태에서 다친 것이 아니다'며 입원기록을 수정해달라 줄기차게 요구하던 한 보호자와 병동에서 소리높여 다퉜는데 급기야 병동 집기까지 파손되는 사태까지 발생했고, 결국 보안팀이 투입되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기도 했다. 환자를 치료하는데 있어서 의사는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의학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워왔지만, 그와 같은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갖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전 수술 후 상태가 좋지 않았던 한 보호자가 거세게 항의했던 일이 있었다. 머리 수술 후 감염증세로 상태 호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보호자들에게 약을 쓰고 있으니 좋아질거라는 막연한 전망 외에는 그 어떠한 말도 전할 수 없었다.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도록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그 환자의 보호자들은 결국 내게 actung out을 했고, 더이상 의료진을 믿지 못하겠다며 일주 내로 상태 변화가 없으면 병원을 옮기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중환자실 앞에서 매일 그들을 만나서 시달리는 일은 하루 일과 중 하나처럼 되어버렸고, 결국 내게 환자를 기필코 회복시키고 말겠다는 오기마저 생기게 만들었다.

 다행히 약속 시간 내에 환자 상태가 조금씩 나아졌고, 어느 햇살좋은 가을 날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던 그 환자는 배고프다며 밥을 달라고 내게 말했다. 환자의 상태 호전에 보호자들은 매우 기뻐했고, 나 역시 고통 받았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다음날 보호자 중 일부가 내게 고맙다며 쵸콜렛을 전해왔고 그간의 무례함에 대한 용서를 구해왔다. 지난날 의료진을 불신했던 그들의 이중적인 태도가 괘씸했지만, 보호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러한 상황 속에선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쵸콜렛과 함께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사건은 일단락 되었고, 환자의 상태도 이후 호전되어 지금은 퇴원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태다.

 보호자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늘 어렵다. 환자의 의학적 문제가 해결되고 상태가 호전되면 의사는 신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원망의 대상이 된다. 특히 신경외과 환자들은 중환이 많기 때문에 늘 '어렵다', '위독하다', '회복 가능성이 적다' 등의 말을 자주 건넬 수 밖에 없고, 보호자들과 웃으며 마주하기 힘들 수 밖에 없다. 오늘도 나는 중환자들의 보호자 앞에 서서 변변치 않은 말솜씨로 환자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막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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