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로 병원을 이탈 중인 이년차 쌤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수술 준비를 하고, 프리 라운딩을 돌고, 스텝 회진 마친 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며 오더를 내기 시작했다. 십분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들리는 '꼬로록' 소리가 들렸고, 따쓰함이 깃든 손바닥으로 쓸어내려보니 전날에 비하여 상당히 홀쭉해진 내 배가 만져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배는 어제 오후 6시 국수를 먹은 뒤부터 계속 금식 상태였다.

 조금만 더 굶겼다간 이 녀석이 무슨 사고라도 칠까 싶어 초응급으로 의국에 널부러져 있는 양과자를 몇개 주워먹었다. 하지만 이 녀석이 내게 원하는 것은 겨우 과자 몇쪼가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씹히는 건더기가 있으며, 한국영양협회 제안 기준 500kcal 이상되는, 거기에 어머니의 따스함이 반드시 포함된 식사를 대체할만한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정규근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일년차 주제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병원 앞에 있는 국수집을 급습했다. 여기에 대담하게도 무려 컵라면도 아닌 멸치국수를 그것도 김밥과 함께 주문했고, 김밥은 반드시 초장에 찍어먹어야 한다는 대학시절 한 선배의 가르침에 따라 가게에 없는 초장까지 공수하여 내어놓을 것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후루룩짭짭,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눈빛으로 국수와 김밥들을 썩션하고 있던 찰나 내과 스텝쌤 한명이 국수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안면이 있던터라 서로 어색한 인사를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 냉랭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 진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데다 이미 퇴원한 한달 전에 컨설트 냈던 환자의 소견을 물었고,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다. 10초간 침묵의 시간이 지났고,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주문했던 그 분의 모밀이 주방에서 급공수 되었고 이내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정규 근무시간에 먹을 것을 탐하는 공범임을 감안한다면 이 말도 안되는 사태는 가슴 저편에 꽁꽁 묻어둘 것이 명약관하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내 앞에 펼쳐진 적지만 따뜻한 그 완성된 세계를 즐길 수 있었다.

 초장에 찍어 먹는 김밥은 비단 칼의 명인이 만든 사시미로 뜬 다금바리 회와 고시히카리 쌀, 울툴불퉁한 와시비를 직접갈아 만든 와사비장 이 세가지 재료로 초밥왕이 손수 쥔 다금바리 초밥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맛이었다. 거기에 여수산 멸치로 우려낸 육수와 탱탱한 면발은 오로지 썩션 외에는 다른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국수집에는 해상왕 이명박의 담화문 발표 그리고 신경외과 일년차와 내과 스텝이라는 두 통의 썩션기가 돌아가는 소리 외에는 한치의 잡음조차 없었다. 식사를 거의 다 마칠 무렵, 낯익은 얼굴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 김밥과 국수 포장을 주문했다. 누군가 뚫어지게 쳐다봤더니, 그 아주머니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이내 우리는 환자 보호자와 의사로 만난 적이 있음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보호자는 병동에 있던 뇌종양 수술 환자의 부인으로 수술 전 설명을 하고 동의서를 받을 때 참 걱정을 많이했었고, 덕분에 수술 과정과 합병증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하느라 한시간이 넘도록 진땀을 빼야했다. 다행스럽게도 수술이 잘 되어 지금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고, 아저씨가 만두국을 먹고 싶다는 말을 듣고 그날 국수집을 찾아왔던 것이다.

 이후에도 썩션하는 나와 내과 스텝 선생님, 그리고 주문포장을 기다리는 아주머니 사이에 적막감은 지속적으로 흘렀다. 먹는 내내 아주머니는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내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앞에 놓인 진수성찬을 빨리 해결하고 그 아주머니의 음식까지 계산하고 가야만 한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다가 아주머니가 주문한 포장음식이 먼저 나왔고, 망설이던 그녀는 본인의 음식값만 계산하고 황급히 식당을 떠났다. 아주머니가 전부 계산하고 가면 그 민망함을 어떻할까 고민하던 내게는 참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안심하던 찰나, 밖으로 나갔던 아주머니가 급하게 식당으로 뛰어들어오더니 나를 가리키며 선생님 밥값까지 같이 계산해달라며 막무가내로 돈을 들이 밀고는 뛰쳐나가버렸다. 문을 거칠게 제끼며 아저씨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년차 나부랭이 따위에게 대접하지 않아도 된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아주머니의 고집을 꺽을 수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얻어 먹고만 살지 못하는 성미라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따뜻한 커피 넉잔을 사서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옆 침대의 환자에게 건넸다. 아주머니에게는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식사 대접 잘 받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다음부터 이런 뇌물(?)은 사절하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사실 그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경우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상태가 악화될 수 있는 위치에 뇌종양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우리 교수님의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왔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기에 당장 지불할 병원비 걱정에 매일 고민했지만, 마음만은 참 따뜻했었다. 한참은 어린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수술방에 들어가기 직전 내 손을 잡고 아저씨를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보였던 그날 그 순간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수술 직후 아저씨의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도 의료진을 믿고 불평없이 회복의 순간을 기다려줬으며, 매일마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불평에 시달리는 내게 그런 아주머니는 참 고마운 존재였다. 어느 눈내리는 아침날 4000원 남짓의 비교적 값싼(?) 식사 로비였지만 아주머니에게서 전해졌던 그 따뜻함만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따뜻함을 전하는 의사가 되도록 노력할께요,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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