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휴가 시즌을 맞이하여 로딩이 두배이상 늘어난 탓에 눈코뜰새 없이 바뻐졌고, 새벽 3시가 되서야 다음날 오더를 넘기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 의식 상태는 치매 환자 못지 않게 흐려지고 있다. 어제 이미 수술한 환자에게 내일 수술하면 좋아질거라 격려하는가 하면, 허리 수술한 환자에게 머리 수술이 잘되었다 설명하고, 오늘 입원한 환자에게 내일 퇴원 준비하라는 등 똥오줌 못가리는 아마츄어틱한 실수가 점차 잦아지고 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거의 넋이 반이상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일하며 보내고 있다.

 이틀전에는 수술방에서 저녁 10시가 되서야 겨우 밖으로 기어 나와서 깔아둔 응급실 콜을 처리하고 병동일을 처리하고 다음날 환자 오더를 넘기니 새벽 4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하루일과를 마치니 한순간에 긴장이 풀렸고, 그제서야 내 몸은 식생의 본능을 찾을 수 있었다. 오전 8시 병동 스테이션에서 주워먹었던 과자 부스러기 외엔 하루종일 밥한끼 먹지 못했기 때문에 몸 속에서는 무언가 먹을 것을 달라 아우성 치는 꼬로록 장음이 진동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섭식행위를 진행한다면 필시 다음날 밀려올 장트러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명약관화였기에 인내하며 참기로 했다. 불경의 한구절도 외워보고 물도 들이켜봤지만 먹고 마시고 씹는 본능적인 즐거움을 채워주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차오르는 살과 다음날 원만한 일과의 잰행을 생각한다면 참아야했고, 그 대책의 일환으로 TV 코미디 프로를 보며 웃음으로써 내가 당면한 현재의 어려움을 승화시키리라 마음먹었다.

 헌데 이게 왠일인가. 새벽 늦은 시간탓인지 정규방송은 모두 먹통이었고, 오직 7번에서 방영되는 롯데 홈쇼핑 방송만이 내가 선책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었다. 한 연예인이 탈모 방지 제품을 광고하는 내용이었고, 내용이 지루했는지 스물스물 잠이오기 시작했다.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왠 미녀들이 007 가방같은 포장세트를 들고 춤췄고, '이번 기회가 마지막 명절을 맛있는 고기와 함께 하세요' 라는 쇼호스트의 진부한 멘트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면은 삽겹살 구이의 향연. 꿈에서만 그리던 파재리, 삼겹살, 김치, 마늘, 감자, 버섯이 대형 그릴 위에 동시에 구워지는 진풍경이 이어졌고, 시상하부 식욕중추에서는 그렐린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삼겹살 굽는 연기와 함께 의식 상태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쇼호스트가 불러주는 번호들을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에 찍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번호만 누르면 곧 바로 즐길 수 있다는 쇼호스트 누나의 말에 ARS 안내에 따라 열심히 계좌번호를 눌렀고, 이제 곧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망상은 나로 하여금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한참 뒤 주문이 완료되었으며 내일 배송이 될 거라는 ARS 안내양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혼돈의 의식 상태와 배고픔은 잘못된 지름에 대한 후회할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게 방송을 보며 십여분을 더 헥헥대며 배고파 하다가 지쳐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가 되서야 13만원이 결제되었다는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순간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13만원을 날려버리다니, 마음 저편에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 이를 어찌할꼬. 홈쇼핑 고기상품 치고는 참 비싼 이 상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며 하루 일과를 보내던 찰나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로부터 한통의 문자가 왔다.



 그렇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원하고 상상하던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굽는 그릴이었고, 심지어 배송지를 병원이 아닌 고향집으로 지정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신경외과 일년차라지만 정신줄은 붙들고 살아야지 싶다. 그리고 설을 맞이하여 전 부치시는 어머님 고생 덜 하시도록 대형 그릴은 반품은 하지 않고 고향집에 선물하는 방향으로 훈훈하게 마무리했다는 뒷이야기. 그나저나 또 고기먹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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