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마지막 날 아침 응급실로부터 중증 외상 환자의 도착을 알리는 문자메세지가 날아왔다. 환자는 서른 다섯 살의 우즈베키스탄 출신 외국인 노동자로 목격자는 없었으나 머리에 외상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발견당시에 혼수상태로 응급실을 경유 중환자실로 입원했다. 내원 후 시행한 CT에서는 우측 대뇌 주변부에 경막하 출혈 및 뇌허탈 소견이 관찰되었으나 의식이 혼수상태인 점과 더불어 혈압 등의 생체 활력 징후가 불안정하였기에 수술적 처치는 어려운 상태였다. 우즈베키스탄에 부인과 아들, 딸을 둔 가장으로써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던 그는 지난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한 정비업체에서 동료들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왔다. 내원 전날 구정을 맞이하여 동료들과 숙소에서 술 한잔씩을 나눴고, 화장실을 가다 잠시 머리를 부딪혔던 것 외에는 특이 외상력도 없었지만 아침이 되도록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동료들에 의해서 응급실로 후송되어 왔다.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친보호자가 필요했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 함께 온 동료들 외에는 대한민국 땅에 혈육 하나 없었고, 그렇게 머나먼 타국 땅에서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동료들은 절규했다. 그리고 한국어 구사가 자유롭지 않았던 우즈벡 동료들과 의료진의 대화는 원할치 못했다. 환자의 상태가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정도며 수술은 어려운 상태라고 수십번 설명했지만, 어떻게든 무조건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십여차례 이상 설명했을까, 갑자기 그들은 '머니' 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마 수술비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수술해주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았다. 돈 때문이 아닌 수술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바디랭귀지까지 동원하여 다시금 그들에게 수차례 설명했다. 갑자기 고개를 머리 아래로 떨구며 한숨을 푹 쉬더니, 갑자기 배를 가르는 시늉을 내며 엑스표와 함께 무슬람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뒤늦게 찾아온 한국인 근로자에게 그가 장기기증 거부의사를 표현한 것이 맞냐고 묻자, 그는 내게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슬람 신도니 장기만은 제발 떼가지 말아달라는 의미였을거라 전했다. 그와 그들의 동료 중 상당수는 급여도 제때 받지 못하며, 적정 근로 시간 이상의 노동력을 착취 당하기 일수고 대부분은 한국인 사장에게 한번쯤 폭행당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한국이라는 땅은 단지 그들에게 돈벌이를 위한 일터이자 악마같은 착취의 공간일 뿐이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우세한 것이 현실이라는 말을 듣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는 전 인구의 2% 를 상회하는 백만 명을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국제 결혼과 출산 그리고 외국 국적 취득 등으로 한국사회는 이제 단일 민족에서 다문화 국가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처참할 뿐이다. 그들이 벌어먹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일자리는 한국인들이 기피하고 혐오하는 소위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3D 업종이다. 그들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빈번한 산업재해 등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과다한 업무에 시달리며 받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는 빈번한 작업장 사고나 외상을 유발하고 스트레스나 불안, 우울 등의 정신적인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인권침해와 차별은 그런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한국과는 다른 문화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손으로 음식을 먹고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다며 비웃고, 술을 억지로 먹이며 다른 종교 활동을 강요하는 등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들과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려고 배려하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의 단편영화 옴니버스 <여섯 개의 시선>의 6번째 작품 찬드라의 이야기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한국인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99년, 서울의 한섬유공장에서 보조 미싱사로 일하던 네팔 노동자 찬드라 구룽은 공장 근처 식당에서 라면을 시켜 먹는데, 뒤늦게 지갑이 없는 사실을 안 찬드라는 계산을 하지 못하고 식당 주인은 그를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그리고 경찰은 한국어를 더듬는 찬드라를 행려병자로 취급해, 결국 6년 4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된다는 이야기인데, 영화는 이 과정을 찬드라의 시점을 빌려 그려내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찬드라가 느꼈던 고통, 공포심 등을 그녀의 시점을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하나되는' 이라는 노래를 흥얼대며 지구촌을 외치고 다문화 존중을 외치는 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얼마나 모순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셈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무궁화로 뒤덮인 한반도 포스터를 그리며 애국심에 대한 세뇌적인 가르침을 들어왔다. 더불어 지구촌이라는 단어 역시 누구나 입만 열면 툭 튀어 나올 정도의 세뇌교육을 받고 자랐다. 무궁화와 지구촌.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새어나오는 이 상투적인 단어는 그간에 우리들의 의식 속에 어떻게 조화되어 왔을까. 외국인 노동자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에 깔린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지구촌을 외치며 백색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우리들의 환대는 참으로 모순적이지 않는가. 대학에 와서 처음 듣는 영어 교양강좌의 교수가 흑인이라는 사실에 실망하듯 말하며 저급 흑인 영어를 가르치면 어쩌지라고 내심 걱정했던 내 친구들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옆자리를 앉게될까 조마조마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우즈벡 환자와 동료들을 마주하면서 과거의 부끄러웠던 내 자신을 다시금 대면하는 일은 무척이나 불편했다. 이러한 불편함은 결국 스스로가 그렇게 부정했건만, 나 역시 한국 사회에서 남들과 똑같이 숨쉬고 생각하는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설 마지막 연휴, 마음 속 깊히 과거를 반성하며, 가족도 만나지 못한채 머나먼 이국 땅에 숨을 거둘 그와 그들의 동료에게 머리숙여 미안함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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