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병원이라는 답답한 새장 안에 갇혀서 죽도록 일만 하는 불쌍한 신경외과 전공의 팔자지만 때때로 환자나 보호자들이 전해오는 그 감동이라는 녀석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 참을 인자를 머리에 새기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때려치우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환자와 보호자들 때문에 떠나려는 발걸음을 차마 내딛지 못하고 있다. 설사 내가 없다한들 내 일을 대신할 혹은 내 빈자리를 메꾸어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신경외과라는 수레는 어떻게든 돌아갈 것이다. 내 존재는 드넓은 놀이터의 모래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줌 옮기는 것보다 더 하찮고 미미하겠지만, 그래도 나를 기억해주고 아껴주는 그들이 있기 때문에 늘 감사하고 행복하다.   

얼마 전 일하던 도중 갑작스레 발생한 의식저하를 주소로 응급실에 내원했던 한 아저씨의 부인도 내게 그런 소소한 감동을 전해주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응급실 호출을 받고 늦은 새벽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나 아래로 내려가 보니, 수술이 필요한 뇌출혈 환자의 CT 사진이 떡하니 들어왔다. 환자의 곁에는 환자의 발을 쉴 새 없이 주무르며 흐느꼈던 그의 부인과 직장 동료로 추정되는 남성이 함께 있었고, 가운에 적힌 '신경외과' 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내게 달려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내 수술적 치료가 필요함을 설명했고, 환자의 상태 및 수술 과정과 함께 동의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머리를 수술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그의 부인은 망설이더니 약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겠냐고 물었다.

그의 부인이 고민하던 사이에 혈압 강하제를 상당량 투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절되지 않는 혈압에 환자의 의식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부인에게 불같이 역정을 내버렸다.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도 있으며 남편을 살리고 싶으면 당장 서명하라 윽박을 질렀다. 불면의 괴로움과 그간의 피로, 거기에 관 하나만 머리에 꽂으면 충분히 회복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망설였던 그녀의 안이한 태도 때문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화산이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것이다. 결국 그의 부인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했고, 이후 모든 과정은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Shaving부터 시작해서 프레임을 박고 CT를 찍고 수술 방에 들어가기까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고, 1시간 남짓을 수술 방에서 보낸 뒤 환자는 중환자실 자리를 배정받아 올라갔다. 수술 직후 촬영한 CT에서는 응급실에 도착해서 찍었던 CT보다 출혈량이 상당히 늘어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자의 의식 상태는 결국 기면에서 혼미까지 나빠졌고 자발적인 움직임도 저하되었다. 조금만 더 일찍 수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향후 도관을 통해 배액이 잘만 이루어진다면 충분히 회복 가능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부인에게는 퉁명스럽게 수술이 잘되었다는 말 한마디만 던지고 당직실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중환자실 앞에 서있던 부인이 작은 상자와 함께 봉투를 하나 건넸다. 필시 돈일 꺼라 생각했고, 안 받겠다고 단호히 거절한 채 줄행랑을 쳤다. 부인 때문에 수술이 지연된 것에 대한 원망스러움과 미움이 마음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설사 돈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녀로부터 무언가 감사의 인사를 받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저녁 무렵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그녀의 부탁을 받았다며 내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넸고, 그 밑바닥에는 돈 봉투라 여겼던 작은 편지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집에서 손수 만들어 온 못생긴 과자들과 함께 수술이 잘되어 남편의 생명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새벽 1시 수술 방에서 나와 책상에 앉아서 그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며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내가 왜 이 피곤하고 힘들고 짜증나는 생활을 계속해야만 하는지 조금이나마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언젠가 지치고 힘들고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캐비넛 저 속의 비밀창고에 꼭꼭 숨어있는 그녀의 편지를 읽어볼 생각이다. 그 과자와 편지가 전해주었던 감동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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