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죄송합니다. 손님. 이건 저희가 먹으려고 퍼놨던 건데 그만 밥그릇이 바뀌었나 봐요. 지금 새로 갖다 드릴게요.”

토요일 11시 경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편히 이야기할 곳이 마땅치 않아 눈에 보이는 횟집에 들어갔다. 회덮밥을 시키고 가게 안을 둘러보니 시골 횟집이라 그런지 아직 장사할 채비가 덜 되어보였고 우리가 너무 일찍 들어온 것은 아닌가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반찬들이 상 위로 올라왔고, 이윽고 커다란 그릇에 야채와 횟점들이 담겨 나왔다. 밥과 고추장만 넣고 비비면 맛있는 회덮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밥그릇을 열어본 친구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음식을 가져다 준 아주머니를 불렀다.

“저기요, 밥이…….”

드르륵. 탁. 아주머니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못 들은 것일까? 친구가 자신의 밥그릇을 보여주는데 하얀 쌀밥이 아니라 군데군데 노릇노릇한 눌은밥이었다. 내 밥그릇을 열어보니 내 밥도 눌은밥이다. 허어, 이건 또 무슨 대접인가. 아주머니를 재차 불렀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친구가 일어나 주방으로 가려는 것을 말렸다. 눌은밥을 줄만한 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눌은밥이면 어때. 밥을 아직 못했나 보지.”


나의 제지에 친구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마지못해 자리에 앉아 밥을 떠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나도 밥을 비비기 시작했지만 눌은밥이라 그런지 잘 비벼지지가 않았다. 힘들여 밥을 비빈 후 한 입 물어보니 단단한 눌은밥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도저히 회덮밥의 풍미를 느낄 수 없었다.

기껏 돈을 내고 먹는 음식이 이러하니, 점점 기분이 상했다.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바람에 낙엽 날리듯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늘이 토요일 오전이라 아직 밥 준비가 덜 된 걸까? 손님이 왔으니 내쫓을 수는 없고 그냥 어제 지어놓은 눌은밥을 내놓은 걸 테지. 친구의 부름에도 아주머니가 돌아보지 않은 것은 못 들은 것이 아니라 미안하니까 못들은 척 한 게 아닐까.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다. 밥이 없어서 전날 했던 밥을 줘야만 하는 사정이었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니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밥이 없었다면 손님을 받지 말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 눌은밥을 주면서 죄송하다는 말이라도 한 마디 했어야 옳다. 아니면 적어도, 밥이 이상하다고 손님이 부르면 그 물음에 응대라도 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왕 먹기 시작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쿨하게, 모른 척 계산하고 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계산하면서 따끔하게 주인에게 한 마디 충고를 해주는 것이 나을까. 지금이라도 주인을 불러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를 해야 하나? 괜히 서로 낯붉히기 싫으니 계산은 계산대로 하고, 인터넷 포털에 이 음식점이 등록되어 있다면 낮은 평점을 줘버릴까. 별의별 잡생각이 떠오르는 바람에 음식 맛도 모를 판이었다. 어찌되었건 이미 회덮밥을 반 이상 비웠을 즈음, 누군가가 화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아주머니가 당황한 표정으로 문을 열더니, 우리들의 밥그릇을 살폈다.

“혹시 여기, 눌은밥이 왔나요?”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밥그릇에 남아있던 눌은밥을 본 주인아주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해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님. 이건 저희가 먹으려고 퍼놨던 건데 그만 밥그릇이 바뀌었나 봐요. 지금 새로 갖다 드릴게요.”

아주머니는 새하얀 쌀밥을 두 그릇 다시 가져왔다. 하지만 이미 눌은밥을 비벼서 거의 다 먹은 시점이었기에 그 쌀밥을 더 먹을 수는 없었다. 결국 주인은 계산할 때 밥값은 빼서 계산해주었고, 거듭 미안하다는 사과를 덧붙였다.

밥을 먹고 나오니 스스로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저 밥그릇이 바뀐 것뿐인데 밥이 없었던 것인지 아주머니는 못들은 척 방문을 닫은 것인지 의심했던 내가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차라리 그냥 당당하게 ‘왜 눌은밥이 나왔나요?’ 하고 물었으면 될 것을, 괜히 착한 척하면서 눌은밥은 눌은밥대로 다 먹고 마음속으로 불평을 쌓아갔던 것이다.

체면 때문에 할 말을 제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하나하나 지적하면 왠지 속 좁아 보일 것 같아 대범한 척 넘겨버리곤 한다. 하지만 정말로 너그러이 넘어갈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 때 그 때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좋다. 괜히 마음이 넓은 척 착한 척 하려다가 오해가 쌓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가 일찍 알아챘기에 망정이지, 자칫 괜한 오해를 해 다른 이들에게 횟집에 대해 험담을 할 뻔 했다. 거짓된 배려와 양해는 오해나 진배없다는 교훈을 얻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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