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별 일 없는 줄 알았는데
남들 보기 멀쩡했는데
사실 우리의 일상은 아주 취약하다. fragile...
알고 보면 여기 저기 허점투성이다.
그래도 마스크도 덮어씌우고 가면도 여러 개 바꿔 쓰면서 꾸려가며 사는 게 인생이다.
인간은 person, 가면은 페르소나(persona).
결국 인간은 가면을 쓴 존재.

그런데 큰 병이 걸리면 그런 취약한 일상들이 금방 한계를 드러낸다.
병은
나의 약한 고리를 들추어내는 계기가 되고, 거기서부터 일상의 균열이 시작된다. 그냥 보일 듯 말듯 살짝 금이 간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벽이 갈라진다.
내 존재의 의미, 돈 문제, 가족의 갈등, 묵은 상처의 드러남...

가족의 누군가가 병에 걸리면
가족이 합심해서 환자를 돕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환자는 최선을 다해 투병하고
치료를 마치고 나면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
그것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 삶은 드라마가 아니기에
아픔과 투쟁의 연속이다.

응급실에서 만난 보호자. 어쩔 수 없이 나에게 그런 아픔을 드러낸다.
환자에게 잘 대하지 못하는 자신이 못됐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환자도 원망스럽다.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순식간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듣는 나도 이해가 된다.

그래도 내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환자는 아픈 사람이고, 환자를 치료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방법이 없고
가망이 없고
도리가 없다면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목숨이 우리 맘대로 되는 것입니까? 살아있는 한 최선을 다합시다."

고혈압과 뇌졸중의 병력이 강한 우리 집.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면, 우리 집도 허술하고 무너질 부분이 어디인지 눈에 보인다.
나도 무너지고
지금을 후회하겠지.

병을 앓는다는 것은
인생을 앓고
마음을 앓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를 본다는 것은 병만 보아서는 잘 해결되지 않는 복합적인 과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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