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환자는 거의 여자환자다. 대개 아줌마, 할머니. 가끔 아가씨.

오늘은 토요일 외래.
내가 주치의는 아니지만 토요일 외래 때 피검사를 하러 오는 젊은 훈남 총각이 있어 가끔 만나는데 그 가 오늘 외래에 왔다. 항암치료 중 수혈이나 백혈구 촉진제를 맞아야 할 때 토요일 내 외래에서 만나게 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 추석 무렵이었는데, 추석 연휴기간이 끼어있어 백혈구 촉진제 맞는 문제, 입안 허는 문제를 상의했었다.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그, 연휴기간 동안 열나면 어떻게 할지, 무슨 종류의 가글을 하면서 점막염을 호전시킬지 환자랑 논의해야 했다.

매우 준수한 외모, 그는 별 말이 없고, 내가 뭔가를 설명하면 그냥 끄덕끄덕 알겠다고 대답만 했다. 재발 후 하는 항암치료라 약제가 매우 독하다. 매일 의사를 만나는게 좋은데, 연휴가 끼어서 지방에 있는 집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백혈구 수치를 보니 걱정이 된다.

연휴기간에 입이 헐면 열이 날 가능성이 높아서 마침 나에게 새로 나온 가글이라며 제약회사에서 준 견본품 가글이 있어서 그것도 한 병 얹어 주며 열심히 하라고 교육하였다. 그 뒤로 외래에서 몇 번 보았다. 내가 주치의는 아니지만, 서로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인사할 정도가 되었다.

그가 오늘 외래에 들어오는데 얼굴이 뽀얗다. 호중구가 100개밖에 안되는데 기운도 좋고 거뜬해 보인다.
 
젊으니까 잘 견디나 봐요. 컨디션 나빠 보이지 않네요.
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에요.
식사 잘 하고 있나요? 입맛은 어때요?
어제 *** 음식점에 갔는데, 별 두개 반이었어요. 친구는 세개 반 줬는데.
별 두개 반이 뭐에요?
미쉐린 가이드 모르세요?
그게 뭐에요?
제가 좀 미식가거든요. 프랑스에서 만들기 시작한 미쉐린 가이드라는 게 있는데요. 다른 가이드도 있지만 그건 정말 믿을게 못 되요. 너무 대중용이라 평가가 정확하지 않은 거 같아요. 제 친구가 그런 쪽에서 일해서 같이 먹으러 갔어요. 제 입맛이 까다로운 건지, 제가 봤을 때는 한옥에서 프랑스 음식 먹는 거 말고는 특별한 맛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호중구가 너무 낮아서 입맛이 없었던 게 아닐까요?
그럴까요? 암튼 어제 거긴 별루였어요.
그런 추천해줄만한 음식점 있어요? 별 다섯 개 정도 되는.
그럼요. 강남 가로수길에도 있고 삼청동에도 분점이 있는데요, 삼청동 *** 라는 곳에 가보세요. 거기 최고에요. 왜 최고냐면요. ****** 때문이에요.


그게 남자 화장품인가요?

그가 이유로 든 설명의 반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용어다. 꽤 전문가인 것 같다. 못 알아먹는데, 그가 술술술 풀어내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마냥 들어본다.


피부도 지난 가을보다 더 좋네요. 남자들도 피부에 신경쓰나요?
그럼요.
피부 관리를 위해서 뭘 하는데요?

갑자기 이 총각, 주제를 음식에서 피부관리로 바꾸어 설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예전에 내 환자 중 메이크업 선생님한테 들은 얘기를 옮겼더니 더 강한 어조로 확고하게 설명한다.

같은 가격 대비 가장 우수한 제품은 우리나라 회사의 ** *** 제품이 최고라며 여기에서 나온 미스트를 먼저 뿌려서 수분을 준 다음 에센스, 스킨, 로션은 외제지만 ** 에서 나온 **** 제품이 제일 좋은 거 같다고. 비싸지만 스킨로션에센스는 제일 좋은 걸 써야 한다고 한다. 자기가 이것저것 다 테스트 해 봤는데 이 제품이 최고라고 한다. 공항 면세점에서 사면 싸니까 자기는 한 번에 왕창 사 둔다고 한다. 자기 친구들도 다 그거 바른다고 한다. 친구들도 다 멋쟁이인가보다.

그리고 꼭 바깥출입할 때는 선크림을 발라야 하는데, **에서 나온 **** 썬크림이 피부보호에 최고라고 한다.

그게 남자 화장품인가요?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남자 화장품은 화장품이 아니라고, 피부를 위해서는 절대 여자화장품 제품을 써야 한다며, 그 근거를 댄다. 또 알아먹을 수 없는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항암치료를 하면 각질이 많이 생기는데 꼭 각질 팩을 쓴다고 한다. 5-6일 정도 해주면 좋아진다고 했다. 제품은 어느 회사 걸 써도 상관없다고, 화장품 살 때 샘플로 주는 거 쓰면 된다고 한다.

그가 말을 이렇게 많이 하는 사람인지,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뒤에 환자가 오지 않았다면 마냥 그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것 같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나보다.

그는 재발했지만 아주아주 센 항암치료를 하면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병과 싸우고 있다. 그래서 지금 아주아주 센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입원도 자주하고 외래도 자주 와야 한다. 남들보다 훨씬 힘든 치료과정이다.

외래에서 얼핏 보면 항상 모자 쓰고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듣고 있다.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그는 패션감각도 남다르다. 그가 호중구 수가 낮아도, 수혈을 자주 해야 해도, 지금처럼 스타일리시하게 자신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주말에는 그가 소개해 준 *** 라는 격조 있는 별 다섯 개짜리 음식점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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