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방, 책상대신 딱딱한 판때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희미한 슬라이드 불빛에 의지해 노트필기를 하며 들었던 의대 첫 수업

→이런 것이 과연 의대 수업이란 말인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교수님은 한 시간에 슬라이드를 2백장 넘게 돌리고 나가시네. 말을 알아먹을 수도 없는데 필기는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많은 내용을 매일 수업하면 나중에 시험공부는 어떻게 하지? 내가 과연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젠장, DNA가 뭐지?

아직 의사도 아닌데 가운을 입고 병동에 들어섰던 학생 실습 첫날, 감염내과 레지던트 선생님과 돌던 첫 회진.

→깨끗하고 어색한 나의 학생과 가운과는 달리 피도 튀기고 지저분한 가운. 가운 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뻘뻘, 병원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열난다며 난 그 많은 감염내과 협진을 다 보고 그리고 또 자기 입원환자 보고 밤 8시까지 회진을 도는 레지던트 선생님. 회진 후 지친 얼굴로 우리의 학생 케이스 발표를 듣다가 짜증내던 그 선생님을 좋아하기로 결심한 내과 학생실습

중환자실 침대를 밀고 CT 방을 오가는 것으로 시작한 인턴생활

→신경외과에서 시작한 인턴생활, 중환자실 환자 ABGA, 수술 후 CT찍으러 갈 때 환자 keep 하기, 수술 후 뇌압 상승으로 힘주고 변보면 안 되는 환자가 변비를 호소하면 손가락으로 항문자극해서 변 보게 하기, 침대를 끌고 CT방 다니다가 발톱이 찍혀 빠져버리던 날 밤. 컵라면 먹는데 자꾸 손가락 마사지 해달라고 콜 하던 병동 간호사. 그 울분.

1년차가 되어 교수님을 가이딩하고 돌던 첫 회진.

→몇 명 안 되는 환자 파악을 제대로 못 해서 밤새 커닝 페이퍼를 만들고 랩을 외우고 내일 회진을 위해 전날 밤 병동을 돌아다니며 환자 자리와 회진 동선을 미리 확인하던 밤. 교수님이 질문을 하시면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먹고 사오정 처럼 굴었던 첫 회진.

의사가 되는 과정에는 그런 첫 기억들이 있다. 그런 기억을 만들어 가게 될 2012년 학생 실습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외래를 9시 전에 시작하는 나는 오전에 병동 회진을 돌면서 학생들과 여유 있게 학생 입장에서, 학생의 눈높이에서 환자에 대해 토론을 함께 할 여유가 없다. 아직 그런 여유와 연륜이 부족한 것 같다. 허덕이며 사는 내 생활이 이렇게도 반영이 된다. 그렇게 '처음'을 맞이한 학생들에게, 후배들에게, 뭔가를 주는 선배가 되어야 할 텐데….

나의 미안한 마음을 커피 한잔 사주는 걸로 때웠다. 다음번에 나오는 학생들에게는 좀 더 잘 해줘야지. 이번 주 학생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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