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 3학년 시절, 병원 실습을 돌 때, 교수님들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 공세에 시달리며 전공의나 인턴들의 술기를
눈으로만 관찰해야 하는 의료관광객의 역할에 질릴 때 즈음, 어느 덧 나는 응급실 pk가 되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
에서는 만성적인 응급실 일손 부족과 학생들의 술기교육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응급실 pk로
하여금 ABGA부터 L-tube,wound irrigation 등의 다양한 술기를 하도록 했다. 술기를 글로만 배워서 자신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더이상 질문공세에 시달려도 되지 않는다는 것과 더 이상의 의료 관광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유용한 스킬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즐겁게 실습을 돌았던 것 같다 . 특히 나 같이 머리보다
몸을 쓰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당시 순진했던 나는 CT 동의서 받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한 인턴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ABGA,L-tube insertion, 동의서 받는 요령 등을 익혔고, 곧 그 선생님이 해야하는 술기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순진무구한 의대생이었던 나는 안경속에 감춰진 큰 눈을 번뜩이며 더 할일이 없는지 찾아다녔고
급기야 정형외과나 성형외과 선생님들이 시술을 할때마저도 다른 pk들을 제치고 졸졸 따라들어가 어시스트를
서기도 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나보다.

응급실 인턴인 지금, 의대생들이 실습을 나와있다.
학생들에게서 과거의 내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한 pk를 꼬셔 CT동의서 받는 법을 조곤조곤 알려주고 실전을 뛰도록 했다. 동의서를 받아달라고 하면 얼굴에 "앗싸 할일이다!!" 라는 표정을 띄우며 룰루랄라 환자한테로 간다. 어떤 pk가 상처를 irrigation하고 있는데 조금 많이 어설퍼서 효율적으로 하는 요령을 알려줬다. 실전스킬을 배웠다고 좋아하던 그 학생은 내가 처치실로 들어가기전에 먼저 처치실로 들어가 신나게 wound irrigation을 하고 있다. 이제 L-tube 넣는 것도 알려줘야 하고 femoral puncture도 알려줘야 하는데......

저어어어얼대로 내가 편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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