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윗 사람이 날 괴롭히고 아무리 내가 사고를 많이 쳐도 난 의사를 때려 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물론 더 이상 못하겠다는 한계를 느낀 적은 많다.

대개 레지던트 때 도망을 가는 유형은 외재적 요인

1> 윗사람이 쓸데없이 갈굴 때
2> 사사로운 것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계속 혼낼 때
3> 나도 잘못한 줄 알고 있는데 계속 야단칠 때
4> 감정을 실어서 혼낼 때
5> 윗년차가 나에게 복수할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때
6> 우리 병원에 만연한 모순과 비리와 잘못을 나 개인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낄 때
7> 문제가 있다고 느껴도 의사소통 구조가 없어서 해결하기 어려울 때
8> 죽어라 일을 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계속 쌓일 때
9> 그런 시간이 몇달씩 계속 되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내재적 요인

1> 내가 너무 능력이 없다고 깨달을 때
2> 나의 실수로 동료에게 해를 미치거나 환자가 잘못 되었을 때 (후자가 훨씬 큰 타격이다)
3> 매일매일 하는 의사로서의 일상이 나의 적성과 너무 맞지 않다고 생각할 때
4> 너무 바쁘고 힘들게 사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5>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들에 월급도 적고 삶의 질도 너무 낮다고 느껴질 때
6> 전문의가 되어도 향후 별 볼일 없을 거라고 예상될 때
7> 이루고 싶은 다른 꿈이 있을 때

이상의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너무  짜증이 나는데 해결할 방법이 없고 그런 개인적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욱 하여 도망을 치게 된다. 도망가는 당사자의 그 심정은 애가 타고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보기에는 철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정말 그만 두고 싶은 사람은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병원이 무슨 동아리인가. 도망을 가게. 여기는 돈받고 일하는 직장이니까 그런 행동은 용서가 안된다. 그래도 묘하게 레지던트 수련기간에는 학교와 직장의 속성이 섞여서 도망가려고 하는 낌새를 피우는 레지던트 꼬셔서 병원에 다시 데리고 오기 전담반이었던 나는 몇번의 경험을 통해 애들 마음 달래고 꼬셔서 다시 복귀시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일단 레지던트를 하면서 도망가려는 놈들은 100% 윗사람 때문이다.
지가 잘못했든 윗사람이 잘못했든 100% 윗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나갈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비싼 걸로 맛있는 걸 사준다. 선물을 해준다. 음반 귀걸이 책 기타 등등 난 무조건 니 편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윗사람 욕을 살살 해주면서 자기 얘기를 하게 해준다. 그리고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대개 성공이다.
그만큼 말할 여지만 주어도 말하면서 다들 깨닫는다. 나가는게 능사가 아니구나.

그리고 내가 옆에서 동조해 주는 것, You are not alone!!!!!
그것만으로 아이들은 다시 돌아온다. Early intervention 이 효과적이다.
그래서 난 4년차 때 이 직책을 맡아 아이들을 복귀시키는 선도부 역할을 했었다.
왕언니니까 아무래도 애들이 말을 잘 들었겠지..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확 도망가도 되는 때
나 없어도 누군가가 대신 일을 해줄 수 있을 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산 넘어 똥밭이라는 걸.

이제는 정말 도망가고 싶은 상황에 처해도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갈 수 없기 때문이다.
철 들어서 그런게 아니라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다 떠안고 억울하고 힘들어도 다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한다.
그게 바로 나이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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