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수술을 받은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무렵, 그는 배가 많이 아팠다.
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장염이 자주 반복되었고, 그러려니 했다.
심상치 않게 자꾸 아파서 의사에게 여러번 말했는데, 괜찮다고 했다.
CT를 찍었는데 장이 전체적으로 부어있는 상태, 장염 이라고 했다.

그는 그 이후로 6개월간 배가 계속 아팠다 말았다 했다. 더 이상 의사에게 말하는 것이 계면쩍어 그는 한의원에도 가 보고 온열치료도 해보고 금식도 해 보고, 자기 나름으로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배는 나오는데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원래 주치의에게 돌아와서 다시 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재발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너무도 단호하게 재발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의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6개월동안 재발인지도 모르고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어려울 것 같아요. 준비하셔야 되요.
언제 돌아가셔도 후회가 없게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요.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CT는 환자에게 보여주면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만큼 병변이 명백하지 않았다.

복막증은 복막이 두꺼워진 것으로 나타나는데, 딱히 눈에 두드러지는 병변이 아니라 CT를 전문으로 판독하는 영상의학과 선생님께 여쭤보고나서야 비로소 어디가 이상한 것인지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배를 수술한 사람은 정상 구조가 변해있는 상태이고 수술 후 조직변화를 동반하고 있어 복막증과 감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6개월전 사진에서는 명백한 재발의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 아마 그때 배가 아팠던 것이 재발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서 병이 명확해지니 이제 CT에서 잘 보이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환자들은 증상이 해결되지 않고 자꾸 반복되면 의사에게 적극적으로 상의하는 사람,
다른 의사를 찾는 사람,
혹은 민간요법을 찾는 사람으로 나뉜다.

이 환자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여 6개월간 노력한 것이다.

복막증으로 재발하는 병의 경과와 검사가 갖는 한계를 설명하자 이번에는 의사의 태도를 물고 늘어진다.
너무나 단호하게 자기말을 무시하는 바람에 더 이상 그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재발 진단이 늦어진거라고.
환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섭섭할 수 있는 몇가지 이벤트가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스타일은 나를 심리적으로 자극하는 방식이었다.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그런 편안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한번 면담을 하면 30-40분씩 이야기를 하였다. 비슷한 이야기를 몇번 반복하였다. 나는 일단 그의 말을 잘 들어주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매번 다 들어주었다.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재발한 암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빨리 항암치료를 하는게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 치료의 효과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하고 반발하고 현대의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매일 회진하는게 힘들었다.

복수 문제를 해결하려면 항암치료를 해보는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복수를 빼달라고 호소하기를 1주일이 넘었는데 정작 항암치료는 미루었다. 자기가 몸을 좀 만들고 기운을 차린 다음에 하겠다는 것이다. 환자가 치료를 받기에 주관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하면 항암치료를 하지 않는게 원칙이다. 객관적으로도 썩 좋은 상태가 아니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다린다고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그가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를 유도하였다.

자신의 예후에 대해 질문하는 나에게 평균적인 기대여명을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평균이니까 그보다 좋을 수도 있고, 그보다 나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연구에 의하면 주치의가 예상하는 기간보다 환자는 오래 사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한편으로는 한 칼에 희망을 싹뚝 잘라버릴 수 없다는 주치의로서의 희망사항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의 말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환자와 가족에게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다.

그렇게 항암치료를 어렵게 시작하였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다.

4개월만에 초치료 약을 바꾸어야 했다.
2개월만에 다시 약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치료를 해볼만한 다른 약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환자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

진통제를 올려도 배 아픈게 좋아지지 않고, 진통제 부작용만 심하다. 밥을 거의 못 먹는다.

환자는 6개월전과 비슷한 말을 또 한다. 늘 비슷한 대화이다.

나는 그에게 표준 치료의 원칙대로 치료를 하는 것이지만, 치료 약제의 반응은 환자마다 다를 수 있으니 도전할 수 있는 만큼 치료에 도전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그렇지 않으면 지금 더 이상의 대안은 없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6개월전 재발 진단이 제 때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동안 병원과 의사에 대해 쌓인 불만을 얘기했다.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난 그의 말을 경청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나도 지쳤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6개월전에 재발을 진단했다 하더라도 이 병의 평균 예후는 1년입니다. 그럼 지금이 그 1년째인 거에요. 평균만큼 온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항암제 반응도 좋지 않아요. 첫번째 약은 4개월, 두번째 약은 2개월, 이제 세번째 약을 썼을 때 평균적으로는 반응이 더 않좋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도 아직 젊으니까, 몸 컨디션만 괜찮으면 이 약이 나에게 잘 맞을 가능성도 있으니 도전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까지 옛날 얘기만 계속 하실거에요? 재발 진단을 빨리 했으면 항암치료를 빨리 시작했을 거에요. 그렇지만 평균적인 기대 여명에는 큰 차이가 없을 확률이 높아요. 그러니까 자꾸 옛날 얘기하지 말고, 진통제 부작용 때문에 졸린 것도 좀 참으세요. 통증이 조절되어야 밥도 먹고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거에요. 

그냥 한 걸음에 다 말해 버렸다. 그리고 나니 환자가 고분고분하게 내 지시를 따르기 시작한다.

'아, 예후를 나쁘게 말하면 환자가 의사말을 잘 들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후를 좋게 말했다가 나빠지면 원망을 듣지만 예후를 나쁘게 말했는데 예상보다 좋으면 칭송을 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써 볼만한 표준약제가 없을 때 환자의 전신상태가 점점 쇠약해져 갈 때
적극적인 치료보다는 몸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하기 보다는
증상 조절을 중심으로 치료하자고 말할 때 일단 항암치료를 쉬면 환자들은 좋아한다.

그러나 금방 양가감정이 생긴다.

이렇게 쉬다가 병이 나빠지면 어떻게 하죠?

(마음 속으로 :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일단 쉬면 나빠지는 건 시간 문제에요. 좀 나빠지더라도 지금은 욕심내면 안되요. 이렇게 몸 상태가 허약해져 있는데 욕심내서 항암치료를 하다간 죽는 수도 있어요)

(겉으로) 항암치료 독성이 많이 쌓여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쉬는게 낫겠어요.

그러면 꾹 참고 계속 치료할게요. 나빠지면 어떻게 해요.

(마음 속으로: 힘든 걸 참고 항암제를 맞으면 몸만 더 상해요. 굳이 참고 치료를 받을만큼 효과적인 약제가 이제 없는 상황이에요. 지금 치료를 계속 해도 어차피 완치는 힘들어요)
(겉으로) 전이성 암의 치료는 사실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치료받겠다는 자세보다는 몸이 잘 견딜 수 있게 컨디션을 유지하는게 필요해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이제 임종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이번에 퇴원하고 나면 다시 입원하게 된다면 아마 그때는 임종을 하실 것 같다고
지금 잠시 컨디션이 좋으니 주변 정리도 하시고 사람들도 만나시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라고 말씀드린다.

우리나라 정서의 특성 상 이런 얘기를 환자에게 최초로 하면 가족들이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얘기를 가족과 상의도 없이 환자에게 먼저 얘기하면 환자가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면 어떻게 하냐면 원망한다. 교과서적으로는 환자와 가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애둘러 말하지 말고 정확한 언어로, 직접적으로 의사의 뜻을 전달하라고 되어 있다.

예후를 정확히 언급하지 않으면 환자와 가족들은 자꾸 되묻는다.

왜 좋아지지 않는거죠?
왜 치료를 안 하시는 거죠?
왜 이러저러 불편한 증상이 해결되지 않는 거죠?

병 때문에 그래요. 병이 치료되지 않으니까 증상이 완전히 해소될 수 없어요.
이 증상은 아마 호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런 류의 비슷한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 나는 실토하듯 말씀드리게 된다.

이제 어려울 것 같아요. 준비하셔야 되요.
언제 돌아가셔도 후회가 없게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요.

아마 나는 예후를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유방암은 평균적인 예후보다 더 오래 사는 환자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치료효과가 나타나면서 병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마음에, 그런 말을 잘 못하나 보다.

그런데 모든 환자의 예후가 내가 예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치료 마지막에 가면 나도 힘들어 진다.
내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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