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적게는 2~3개, 많을때는 5~6개의 동의서를 받을 때, 대부분의 전공의들은 병동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제약회사 볼펜을 쓴다. 빠른속도로 휘갈기며 글씨를 쓰는 의사들의 습성을 파악이라도 한 듯, 대부분의 제약회사 제공 볼펜은 빠른 속도의 필기를 support할 수 있는 부드러운 필기감과 끊기지 않는 잉크는 기본옵션이거니와, 손에 착 달라붙은 그립감까지 갖춘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 공짜이기 때문에 많은 전공의 및 스탭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있어서 제약회사 볼펜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가운속에 넣어둔 볼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리기 일쑤다. 때문에 스테이션이나 책상에 굴러다니는 볼펜이 있으면 무조건 가운주머니에 꽂아놔야 한다. 내가 흘려버린 만큼 가운 주머니에 꽂아놔야 input과 output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루는 가운주머니에 남은 볼펜이라고는 다량의 잉크똥을 만들어내어 동의서 위를 종횡무진하는 내 손에 달마시안같은 얼룩을 만들어내는 짭퉁모나미뿐이었다. 남은 볼펜이 없는지 의국 책상을 뒤지던 나는 우연히 책상위를 굴러다니던 볼펜을 발견했다. 환자 앞에서 동의서를 받기 위해 볼펜 뚜껑을 열었는데, 알고보니 1회용 만년필이었다. 이럴수가. 악필 글씨에 잉크라도 번지면 망하는 건데!!

만년필을 본 환자는 눈이 휘둥그레해지며 "선생님 만년필쓰세요?"  라고 물었고 나는 침착한 척 "뭐...악필이지만 가끔 씁니다"라는 말로 쿨하게 응답했다. 써보니 꽤 괜찮았다.

잉크도 끊기지 않고 잘 번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동안얼굴이 의사생활에 있어서 일종의 마이너스적 요소가 되었던 나에게 있어서 프로페셔녈 게이지를 up 시키는 아이템인 셈이었다. 그 날로 병동일을 제치고 병원 앞 대형서점내 만년필 코너로 달려갔고, 10만원 이상이면 무료 각인을 해준다는 말에 외과 1년차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각인을 신청했다. 며칠 뒤 택배로 만년필을 받았다. 떨어뜨리지만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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