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에게 종양학 수업을 강의한다는 것은
환자를 대상으로 혹은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강의와는 다르다.

간호사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는 의학적 내용을 근거로 하되
'간호'의 관점에서 그 질환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병의 병태생리학적 과정을 빠짐없이 다 설명하기 보다는 병에 대한 impression을 갖는 정도로 설명하는 편이다.
항상 강의에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전달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의대생 강의는 다르다.
이들은 의사가 될 사람이기 때문에 병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상 너무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머리에 꾸역꾸역 집어넣게 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지식을 가르친다는 미명하에 너무 어렵고 많은 내용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은 학생시절을 떠올려 보면 너무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지만
막상 수업시간이 지나고 나면, 시험을 보고 나면 모든 것이 휘발되어 날아가버렸던 느낌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휘발시켜 날아가버리게 하지 않으면 다음에 들어오는 지식을 수용할 수도 없었다.
저장했다가 삭제하고 다른 지식을 다시 저장하고 삭제하기를 반복하며 1GB memory 의 USB 로 의대 4년을 버텼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 의과대학 교육과정에서 전설처럼 인용되는 유명한 명제, 콩나물 이론에 의하면
콩나물 키울 때 물을 부어주면 순식간에 물이 다 빠져나가 버려서 영양공급도 안되고 이러다가 언제 콩나물이 자랄까 싶지만 매일 물을 주면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 오래지 않아 키가 큰 콩나물로 쑥쑥 자라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제대로 모르고 주입식 교육을 받는 것 같은 의대생들도 어느새 머리에 지식이 쌓이고 축적되어 언젠가 16GB memory USB로 용량이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외국의 의과대학 교육과정을 운운하며 우리도 교육제도와 내용이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리 나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도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것 같다.

다만 그 메모리 확장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업을 준비해 본다.
해리슨 종양학 파트를 몇번이고 다시 읽어본다. 나도 정확히 모르고 있던 내용조차 교과서에 실려있다. 나도 새롭게 알게 되는 내용들도 있다. 의대는 교과서도 빨리 빨리 업그레이드된다.

이 내용을 뺄까 말까?
한 시간에 몇장의 슬라이드가 적절할까?
어떤 그림이 좀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

효과적인 교수법은 진심어린 마음과 성의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도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쪽 분야에 대한 연구, 실질적인 프로그램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들도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나는 핵심적인 메지시를 전달하는 것을 주로 하고, 가능하면 재미있게 강의를 하는 편인데(육두문자+에피소드)
의과대학 학생강의는 재미가 주를 이루면 안될 것 같다. 그러나 재미가 없으면 학생들은 졸기 마련이다.

몇일 동안 진도 안나가는 슬라이드를 만들며 고민을 하다보니 생각이 맴돌기만 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또 그냥 이대로 관성적으로 강의를 하게 되는 걸까?

의사만들기
Making doctors

예전 대학원 다닐 때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의사양성과정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고 이러한 교육과정이 궁극적으로 의사라는 집단의 professionalism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던 책들을 읽었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그런 책을 읽으며 의사/의사집단을 비판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 비판의 대상이 되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은 현실을 주체하지도 못한 채
하루살이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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