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일을 마무리하며 발포비타민을 녹인 생수를 드링킹하려는 찰나, 응급실 당직을 서는 다른 1년차한테 전화가 왔다.

"누나 미안, L교수님 앞으로 아뻬(=충수돌기염)환자 하나 입원할껀데, 터졌어."

L교수님이라 하면 결국 내 밑으로 입원한다는 의미인지라, 한숨을 내쉬며 환자가 수술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 환자의 CT를 열어보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 환자는 수술방에서 나왔고 이윽고 병동으로 올라왔다. 의국 당직실에서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며 놓쳤던 드라마를 보던 나는 수술기록지를 확인 한 뒤 바로 병동으로 달려가서 환자상태를 확인했고, 환자 및 보호자에게 설명을 한 뒤 당분간 항생제를 더 쓰면서 지켜봐야 겠다는 말을 하고 다시 당직실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교수님 회진 전 혼자서 라운딩을 도는 시간, 아침 6:30분이라는 이른 시간 때문인지 환자는 침대와 완벽하게 합체한 자세로 쿨쿨 자고 있어 굳이 깨우지 않았다. 아침에 교수님과 회진을 돌 때 보니 잠이 덜 깬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교수님은 환자의 조절되지 않는 혈당수치를 보며 빨리 내분비내과에 협진을 넣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후 회진전 혼자서 다시 라운딩을 돌고 있는데 보호자는 없었고 환자 혼자 쿨쿨 자고 있었다. 외과 환자들은 수술후 조기 보행이 중요한 터라 결국 나는 환자의 등을 두들기며 깨우기로 했다.

"000님 일어나서 걸어야죠."

"......."

"아..그만 좀 주무시고 일어나보라니까요!!!!"

"....으으..핸드폰 충전기 내놔."

핸드폰에 이미 충전기가 꽂혀있는데 뭔 소리인지 순간 멘붕에 빠졌다. 그 뒤에 환자가 보호자에게 전화를 건다며 스마트폰 커버를 열었는데 맙소사... 핸드폰을 거꾸로 들고 액정이 아닌 폰케이스 커버를 우왕좌왕 터치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러다가 갑자기 화장실을 간다며 수액을 달아놓은 폴대를 끌지도 않고 바로 화장실에 들어가는 바람에 라인이 빠질 뻔했고, 심지어 불도 켜지 않고 문도 닫지 않고, 물도 안내린다. 오마이갓.

다시 환자를 앉혀놓고 물어봤다.

"000님. 여기 어디에요?"

"압구정동"

"올해가 몇년이에요?"

"1970년."

다시 차트를 보고 치매환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환자에게 가서 신경학적 검사를 하려고 하니 말을 안듣는다. 차트에 흔히 쓰는 문구 그대로 "obey 안되어 신경학적 검사 불가능." 그래도 내가 여기저기 만져보려 할 때 내 손을 마구 쳐내는 것을 보면 motor는 살아있는 것 같다.

얼른 교수님께 noti하고 vital sign 및 저혈당증의 이상증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바로 Diffusion Brain MRI 찍어보니 오른쪽 뇌에 다발성으로 뇌경색 소견이 보인다. 설마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 영상의학과 당직에게 연락해서 응급판독을 부탁했으나 역시나 같은 결과가 보인다. 원래 당뇨가 있었으니 그랬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바로 신경과에 연락해서 협진을 보고, 아스피린 투여 이외에는 특별히 해줄 것이 없으나, 원인을 찾기위해 MRI를 full 로 찍어보자는 회신을 듣고 MRI실에 독촉을 하여 한밤중에 진정제를 투여하면서 까지 겨우 MRI를 찍을 수 있었다.

맹장염 환자가 모야모야라니.


그리고 다음날 영상의학과에 가서 받은 판독은 "모야모야병". 결국 신경외과로 전과되어 필요한 몇가지 검사를 더 한 뒤 추후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퇴원했다.

요약하자면 원래 뇌혈관 기형중 하나인 모야모야병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르고 지내던 환자가, 맹장염 수술 다음날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발견하여 검사를 해보니 발견된 셈. 원래 대학병원에서 맹장염이란 터지거나 고름집이 형성될만큼 심하지 않으면 수술후 방귀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뒤 식이를 진행하면 통상 3~4일이면 퇴원시키는 질환이다. 삽시간에 이 일은 외과 의국원사이에 퍼져나갔고 나는 순식간에 캐안습 내공을 가진 우수전공의가 되었다.

맹장염 환자가 모야모야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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