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국 의사시험을 한국 의사가(혹은 의대생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본과 3학년 때인 1994년 가을이었다. 같은 과에 친하게 지내는 P군이 지나가는 말로 국가 고시 공부를 하는 김에 미국 의사시험도 한번 준비해볼까 한다고 하였다.


학교 공부도 따라가기 벅찬데 어떻게 두 가지 시험공부를 할 수 있을까 싶었고 미국에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던 터라 잠시 귀가 솔깃하기는 했지만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우물 안 개구리 고수민의 첫 번째 목표는 일이 힘들고 군기가 센 모교 대학병원을 떠나 일이 편한 그 어떤 병원으로든 진출해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치는 것이었다.


소원대로 편한 병원에서 남들이 편하다고 주장하는 전공을 하게 되고(우리끼리는 절대로 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과정에서 이 미국 의사시험(USMLE, United States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에 관한 이야기를 두 번째로 들어보게 되었다. 내가 2년차일 때 당직실에서 3년차 선배의 책상 위에 놓인 USMLE 준비서적을 본 것이다. 다시 호기심이 발동했고 어떻게 하면 미국 의사시험을 볼 수 있는지, 도대체 왜 미국 의사면허를 따야 하는지, 무슨 준비가 필요한지 한꺼번에 궁금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책의 주인이었던 3년차 선배는 그냥 재미로(재미 일리가 없는 것 같은데) 읽는다면서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정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에 쓸만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다행히 한림대학교 의과대학의 홈페이지에서 미국 의사시험 관련 정보를 상당량 찾을 수 있었다. 내용인지 이 USMLE라는 시험은 외국 의사들에게 미국의 전공의 수련 자격을 주기 위해 고안된 시험으로 step1, step2, TOEFL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험은 대학의학협회 사무실에서 원서를 가져다가 접수를 하고 나서 시험은 홍콩이나 일본에 가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바로 개원할 수 있는 자격도 아니고 더군다나 외국에까지 가서 시험을 본다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었고 나에게 그럴만한 희생을 감내할 동기가 없었다. 우스개 소리로 의사는 인생을 세 번 쉰다고 한다. 20대에 의대 졸업하고 인턴 들어가기 전까지 쉬고, 30대에 수련을 마치고 군대 가기 전까지 쉬고, 40대에 중풍 맞고 중환자실에서 쉰다고 하는데 그 황금 같은 두 번째 휴식기가 찾아왔다.


2000년 초 레지던트 과정도 거의 마쳐가고 2월말의 군입대를 앞에 둔 시기가 온 것이다. 군 입대를 생각하면 마음이 심란하였지만 뭔가 보람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때 갑자기 관심이 가게 된 것이 영어공부였다. 예과 1학년 때 사설업체가 대학 강의실을 빌려서 열었던 영어강좌를 들었을 때 학력고사 영어 성적이 꽤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벙긋도 못하는 굴욕을 당했고 결국 지속하지 못하고 그만 두었던 아픔이 그 때까지도 한으로 남아 있었을까?


2000년 1월 당시에 주간동아라는 잡지를 보다가 한 영어교재의 서평을 읽게 되었는데 갑자기 보리수아래의 석가처럼 강한 깨달음이 밀려왔다. 나도 영어에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군대 갈 시간은 다가오고 영어에서 뭔가 이뤄보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적었다. 그런데 내가 영어를 공부하는 것을 알게 된 동료들의 반응은 신기하게도 너도 미국의사시험 준비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미국 의사시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왜 사람들은 영어를 하면 미국에 갈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았을까? 나의 대답은 그냥 취미로 공부한다고 했지만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짧은 영어공부의 시간은 지나가고 겨울의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2월 말 경북 영천의 3사관학교에 입소하게 되었다.

 ** 1주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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