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며칠전 40대 후반의 여성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기 전, 저에게 미리 귀띔이 들어왔으니...이틀 전 저희 응급실로 자궁출혈이 심하다면서 그 환자가 왔는데 환자는 어지럽고 출혈이 심하니 입원을 시켜달라고 했고 당직 산부인과 의사는 혈압이나 맥박이 정상이며 검사상에서도 빈혈이 심하지 않으니 입원치료는 필요없다고 하면서 홀몬제를 처방하고 외래를 보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러니까 제게 오기 하루 전, 산부인과 외래를 방문하였고 역시 똑같은 입원치료 요구를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역시 입원치료를 거절했다는군요. 당일, 환자는 아침부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일어나기도 힘들면서 억울한 마음이 들어 응급실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고 (왜 입원치료를 해 주지 않느냐고) 응급실 간호사는 대응하기 어려워하다가 결국 그러면 내과를 보시고 의논하시라는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저는 산부인과 의사와 환자의 사이에서 중재(?)를 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실...환자를 보기 전 들은 얘기로 미뤄보아 무척이나 예민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환자라고 생각했고 만나면 "입원여부는 환자가 정하시는 것은 아니거든요? 의사가 의학적인 판단으로 입원결정을 내리는 것이니 환자 분이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면 안 돼죠!"라는 말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막상 환자를 만나서 얘기를 해 보니..생각보다 환자의 증상이 심한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환자의 요구를 마냥 무시하다가는 결국 환자의 마음이 상할 것이고 결국 병원에 대한 불신이 생길 것 같아서 제 분야는 아니지만 제가 입원시켜서 돌봐 드리기로 했습니다. 토요일이라 환자를 새로 입원시킨다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주말에 회진을 돌아 줄 전공의도 없는터라) 오후에 올라가 다독거리고 월요일에 혈액검사등 해 보고 괜찮으면 퇴원하자는 합의도 했지요.

월요일...혹시나 해서 검사한 혈액검사를 보니 맙소사! 헤모글로빈 수치가 거의 3g/dl가 떨어져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처음 출혈이 되었을 때는 혈액이 농축되면서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던 검사결과가 수액을 공급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제대로 반영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환자분의 출혈은 생각보다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분의 증상이 엄살이 아니라 정말 심했던 것이라는 이해가 되더랍니다. 수혈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액을 공급하고 약도 쓰면서 환자분의 증상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호소를 들어 준 제게 무척 고마워하고 계시지요. 오늘은 처음 보았던 산부인과 선생님과 다시 연결해 드려 부인과에서 치료하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해피엔딩...



# 2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 12-13년전..제가 전문의가 된 지 얼마 안 되었던 젊은 의사 시절이었지요. 종합검진 내시경검사를 하고 있었는데 모 기업의 VIP검진을 받으시는 여성 분...병력을 물어보니 천식이 있다네요. 사실 천식이 심한 경우의 위내시경검사는 위험할 수 있으므로 천식을 먼저 치료하고 내시경검사를 해야 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의 증상은 경미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내시경검사를 하는데 큰 장애가 되지는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분은 호흡기내과를 보지 않고 위내시경검사를 해야 되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저는 반드시 호흡기내과에서 괜찮다고 해야 위내시경검사를 해 줄 수 있다고 강짜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젊은 의사의 권위를 무시하는 듯 한 환자의 태도에 분개했었던 것 같습니다. 중간에 서로 감정이 격해져 "내시경검사 하시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저는 못 하겠습니다." "죽어도 좋으니 내시경검사 해 주세요"라고 싸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결국 저는 내시경검사를 거부했고 그 분은 병원의 고위층에 불만을 제기했었지요. 물론...저는 불려가서 한마디 들었구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 3
자궁출혈이 심해져 입원치료를 요구하는 환자에게 입원을 거부하고 외래 치료를 강제한 저희 젊은 부인과 의사의 심정을 저는 이해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의학적 판단을 거부하고 굳이 입원치료를 요구한 환자가 미웠을 겁니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겼겠지요. 옛날 늑대별도 똑같은 입장이었고 똑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그런 행동을 하거나 그런 판단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의사의 권위는 그런 것으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고...어쩌면 환자가 호소하는 어떤 증상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그런 겸손함이 생겨서일 지도 모릅니다. 또...환자를 보는 마음이 조금 더 넓어지고 아량이 생긴 것일 수도 있지요.

# 4
어떤 환자는 정말 말도 안되는 황당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야비하게 의사를 골리는 환자들도 있지요. 그렇지만 대다수의 환자는 아프고 힘든 사람들입니다. 환자의 통증이나 감각은 의학적인 어떠한 검사기기로도 측정되지 않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의사들은, 특히나 임상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환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 다가 아니라는 겸손함도 필요하구요. 의사의 정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는 환자들에게 핏대를 내고 진료를 거부할 게 아니라 그 환자들에게 다가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해 줘야 할 지를 좀 더 생각해 보는 아량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옛날 늑대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진정으로 감동할 때 의사의 권위는 세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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