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영소아청소년과의원 정우영 원장

오전 진료가 없는 어느 날 아침.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향기와 함께 눈앞에 불쑥 나타난 오륙도가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오륙도는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말이다.

교수 시절을 되돌아보면, 새로움과 나아감의 무한 되풀이라는 표현이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의과대학의 경우 전공 분야에서 본인의 연구 업적과 임상적 경험들을 객관적으로 평가 받는 확실한 방법은 주로 관련 논문의 출판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며, 그 중에서도 Impact factor가 높은 SCI급 의학저널에 발표될 경우 더욱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최초로 진단된 증례이거나, 이미 발표되었던 증례지만 임상적 진행과정이나 치료의 특이성이 입증된 경우 논문의 출판이 가능하였으나, 지금은 증례보고 형식만으로는 출판 자체가 힘들어졌다. 그만큼 출판을 위한 연구는 점차적으로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으며 교수들은 사전에 철저한 연구 계획을 수립해야만 한다.

대학을 떠나기 직전까지 진행했던 유전자 관련 연구들이 공동저자 형식으로 몇 편 SCI급 의학저널에 투고되었으나, 출판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내가 대학을 떠날 때 공동연구를 함께 진행했던 많은 교수들은 여전히 치열한 연구의 현장에 남아있다. 다만 나는 그 자리를 떠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치열했던 순간들은 과거의 기억으로 물러나 앉을 것이다.

염기서열 분석법의 전문화와 고도화로 인한 유전자 분석이 점점 기본적 의료진단의 근간을 차지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진다. 다양한 저신장증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오랫동안 쌓여왔던 미진단 환자의 적지 않은 증례들이 유전자 분석법의 발전으로 인한 유전자 진단을 통해 확진할 수 있게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개원을 하면서 희귀질환 환자들은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였고, 만약 진료를 하게 되더라도 일시적으로 제한적인 부분에서만 가능할 것이라 결론지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지나온 나의 치열했던 진료 여정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큰 아쉬움으로 남았고, ‘좀 더 최선을 다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을 남기기도 했다.

선생님 그 많은 업적들을 두고 어떻게 나오셨어요?” 개원 축하인사차 방문하셨던 한 교수님의 진지한 질문에 어떤 형태로든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기회는 연속되지 않겠어요?”라는 아쉬운 답변 밖에 드릴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오랫동안 저신장증으로 치료 받았던 환자 몇 명이 오랜만에 진료 차 내원했다. 대부분 청소년기를 훌쩍 지나 반듯하게 성장하고 있는 청년들이었다.

개원 축하 인사는 뒤로 한 채 교수님 이건 반칙이예요, 반칙!”이라며 대학병원을 떠나 개원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진하게 나타내었다, 잠깐이었지만 이들과 한동안 서로의 안부,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 그리고 군복무에 관한 이야기, 이성 친구와의 문제들, 전공에 대한 회의감,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직장에서 겪게 되는 곤란한 상황, 향후 새로운 치료 방법의 개발 가능성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현재로서는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듯이, 선생님도 우리를 떠나실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어요. 가장 중요한 점은 선생님도 그걸 원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렇게 우리들과 함께 지내요.”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의지하는 듯 환자가 불쑥 던진 이 말에 대학을 떠나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편협함에 갇힌 나의 사고를 들킨 것 같아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진료를 마치고 이들이 떠난 후 내게 남겨 준 메시지는 내가 어느 장소에서 근무하든 여전히 그들의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최선을 다해 해결 방법을 찾아주어야 할 책임을 지닌 담당의사라는 사실이었다.

이 아침 한 잔의 커피와 오륙도가 나에게 들려주는 무언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삶은 여러 순간들이 이어지는 것이고, 순간들은 시간이 되어 흘러갈지라도, 그때그때 힘들게 몰입해서 이루었던 소중한 결과들은 결코 단절되지 않고 항상 너의 곁에 머물 것이야.’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며, 오륙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정우영 원장
정우영 원장

정우영 원장은 부산의대를 졸업한 소아청소년과, 소아내분비 전문의로 30여년간 부산백병원에서 저신장증 환자 등을 치료해왔다. 부산백병원 유전자연구위원회 위원장, 희귀난치성질환센터장, 희귀질환 경상권·부산권 거점센터장, 국가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시범사업 희귀질환 전문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2022년 4월 정년퇴직 후 해운대 대우월드마크센텀아파트 상가에 ‘정우영소아청소년과의원’을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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