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말린 날들/488쪽/반비/25,000원

왜 우리는 지금 HIV와 에이즈를 다뤄야 하는가? HIV를 둘러싼 문제들은 감염인들만이 마주한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몸과 정상성, 질병과 건강, 개인과 공동체, 과학과 인문학, 자연과 문화 등에 관한 보편적인 문제의식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HIV와 감염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오래 묵은 것이지만 낡은 것은 아니다.” 이 책 <휘말린 날들>은 역사와 의료적 현실, 법의 문제를 넘나들며 바이러스를 둘러싼 사회적 배제가 어떻게 단순한 의학적 위기를 넘어선 박탈과 위험을 만들어내는지를 밝힌다.

구체적 예를 들어, 이미 의학적으로는 충분히 관리 가능해진 질병이 가족으로부터 배제나 입원 거부와 같은 차별을 통해 어떤 극도의 위기로 격화되는지, HIV 감염인에게 특수한 조치를 취하는 게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모두를 보호하도록 고안된 원칙이 의료 현장에서 다양한 이유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을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저자 서보경은 감염을 ‘휘말림’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바로 이 지점을 설득력 있게 파고든다. 통상 사용되는 ‘감염되다’는 표현 대신 ‘감염하다’라는 중동태로 사고하면서 두 가지 이분법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감염과 면역을 침입과 자기방어의 논리로 단순화하지 않고, 생물‧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감염을 설명하는 가해와 피해, 능동과 수동‧피동의 구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처럼 감염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는 것은 더 나은 과학적 앎을 위해, 즉 감염이라는 생명 작용을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현재 부정의를 해결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이 책이 이러한 작업을 통해 바꾸고 싶은 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저자가 길어 올린 이야기들은 무엇보다도 감염인과 그 주변 사람들, 활동가들이 이 순간에도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돌봄과 상호부조의 가능성이다.

서로에게 물들고 마주 닿아 번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아의 좁은 틀을 벗어나 서로 기꺼이 ‘감염하려’ 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너와 나를 구분 짓고, 몸의 경계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태도로는 달성할 수 없는 ‘건강’이 가 닿아야 하는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내가 수없이 발음해온 퀴어‧연대‧책임‧자긍심의 의미를 완전히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는 문학평론가 오혜진의 말처럼, <휘말린 날들>은 퀴어 정치와 현재의 불평등, 부정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동시에 비장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돌파구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바이러스의 생물‧사회적 속성, 생물학‧사회‧문화‧정치적 변천 과정을 이해할 때, 우리가 알고 있던 연대와 공동체‧친족 등의 개념이 새로 쓰이고,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배제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는 미래가 가능해질 것이다.

지은이 서보경

인류학자. 대전에서 태어나 속리산 깊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국에서 가장 이름이 특이한 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울과 캔버라‧치앙마이‧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일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 다닌다. 이주여성의 출산과 출생 등록 경험에 관한 연구로 미국의료인류학회에서 수여하는 ‘루돌프피르호상’을,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돌봄의 미시정치에 대한 논문으로 미국문화인류학회의 ‘컬처럴호라이즌스상’을 받았다. 특히 HIV 인권운동과 사회과학 연구방법론의 결합 방식에 관한 논문으로 비판사회학회‧김진균학술상을 받았다. 감염병의 이동성에 대한 국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생명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인류학의 기반 위에서 새롭게 해명하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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