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의사는 밤에도 일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의사들, 혹은 다른 직업과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나도 전공의 시절에 많게는 24시간 근무(당직), 24시간 휴식 (이런 것을 보통 '퐁당퐁당' 이라고 의사들은 말한다. 퐁은 휴식을 당은 당직을 뜻한다)으로 근무를 했고, 대부분의 응급의학과 전공의 또는 전담의사들은 퐁당퐁당으로 근무를 한다. 의료진의 수가 적은 경우에는 퐁당당(36~48시간 근무에 12~24시간 휴식)으로 일을 하게 된다. 퐁퐁당(24 시간 근무에 36~48시간 휴식)정도만 되어도 살만해진다. 주당 근무시간을 계산해보면 퐁당퐁당의 경우 1주일에 72~96시간 근무이고, 퐁당당은 100시간이 넘는 경우도 생긴다. 이렇게 보니 극한이 맞기는 맞는 것도 같다. 사실 퐁은 말이 휴식이지 대부분의 퐁 시간에는 책을 보고, 발표 준비를 하고, 환자 진료기록을 검토하고, 외국의 논문을 보기도하면 보낸다. 환자를 직접 진료하지는 않지만 근무의 연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 .
퐁퐁당으로 근무를 해야 1주일에 48시간 정도 근무를 할 수 있다. (법정 근로시간이 주 40시간인데..?) 그런데 이렇게 퐁퐁당으로 근무를 할려면 의사의 수가 우선 많아야 한다. 물론 의사의 수가 더 많은 경우에는 퐁퐁퐁당, 퐁퐁퐁퐁당으로 일할 수도 있다. 그럼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충분히 쉴수 있는 근무 일정은 의사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고 환자에게도 좋다. 퐁당퐁당해서 피로가 쌓이고 있는 의사와 퐁퐁퐁당으로 일해서 충분히 쉬는 의사 중 어떤 의사가 환자의 진료를 잘 할 수 있을까? 말하지 않아도 답은 뻔하다. 퐁당퐁당 또는 퐁당당으로 일을 하다가 보면 컴퓨터 앞에서 진료기록을 쓰다가 졸기도하고, 환자 앞에서 이야기하면서도 눈꺼풀이 내려온다. 그러다 보면 환자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검사결과를 잘못 보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왜 퐁퐁당 또는 퐁퐁퐁당과 같이 의사도, 환자도 좋은 근무일정이 현실에는 없는 것일까? 퐁퐁당을 예로 들어보자. 매일 1명의 응급의학과 의사 또는 전담의사가 응급실에서 근무하게 하려면 퐁퐁당을 위해서 최소 3명의 의사가 필요하다. 3명만으로 운영하면 불가피하게 한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때나, 한꺼번에 2명이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 등에 대처할 수 없으므로 보통은 최소 4명의 의사가 있어야 퐁퐁당 근무일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그럼 응급실에 상주하는 의사는 1명만 달랑 있어도 될까? 응급실에 방문하는 환자의 수가 몇 명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1명으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응급실에서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의 수가 2명이 되게하려면 최소 7~8명은 필요하게 된다. 이 계산은 7~8명의 의사가 모두 전문의로서 다른 의사의 감독이 필요없을 때 가능한 계산이다. 만약 레지던트나 인턴이 근무하는 상황이라면 이들과 같이 일하며 감독할 의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 더 많은 의사가 필요해진다.
우리나라에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7~8명이나 있는 병원은 채 5곳도 되지 않는다. 1명 뿐인 곳도 매우 많고 지금은 좀 늘었다고 하지만 여젼히 2~3 정도의 전문의가 있는 병원이 대부분이다. 응급실에서 전문의를 만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선 응급의학과 전문의의 수가 적은 것도 문제이지만, 대부분의 병원에서 많은 수의 의사를 채용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3년 전 미국에 있는 한 병원의 응급실에서 2주간 머무르면서 생활을 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 당시에 그 병원에는 응급의학 전문의가 약 30여명이 있었다. 전공의는 당연히 훨씬 더 많아서 전공의 끼리도 서로 다 모를 정도였다. 물론 그 병원에 방문하는 환자 수는 우리나라 병원들 보다 많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우리나라 응급실에 의사인력은 인턴부터 전문의까지 통틀어도 빈약한 수임에 확실하다.
미국의 응급의학과 의사는 보통 한번에 8시간 ~14시간 정도 근무를 하고 전문의의 경우 직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한달에 10회 안팎의 근무를 한다. 근무는 개인 취향에 따라 한꺼번에 모아서 하기도 하고 1달 동안 고르게 나누어 하기도 한다. 그 병원에 있을 때 한 의사는 10일간 매일 8시간 ~10시간씩 근무를 한 뒤에 20일 간 유럽에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극한(極限)직업이 아니라 극한(極閒)직업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이렇게 근무하니 응급실에서 만나는 환자에게 더 친절하게 이야기 할 수 있고 진료에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공의가 진료한 모든 내용은 상급 전공의와 전문의가 2중 3중으로 검토를 할 수 있어서 발생할 사고도 미리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응급의학과 의사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책적, 경제적 이유로 인해 아직도 많은 응급실에는 극한의 환경에서 일하는 응급실 의사들이 있다. 그리고 환자들도 극한의 환경에서 진료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의사를 위해서도 환자를 위해서도 응급실 의사가 극한직업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중에 혹시 EBS에서 '여유로운 직업'같은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다시 한번 응급실 의사가 주제로 선택되었으면 한다. 그 때 쯤에는 나도 좀 여유롭게 살고 있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