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세 몽고 할아버지.
징기스칸의 후예답게 키는 좀 작아도 인물이 아주 좋으시다.
40대 중반 쯤 되는 아들, 아버지를 좀더 서양화시킨 외모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아들도 잘 생겼는데, 키가 훨씬 크다. 아들은 영어도 잘 한다.

나는 지난주에 이 할아버지를 만나 Kaposi's sarcoma를 진단하였다.
별로 경험이 많지 않은 병. 나는 환자를 만나 공부를 많이 해야만 했다.
대개 이 병은 에이즈 환자에서 많이 나타나는 병이기 때문에
이 환자처럼 HIV 음성이고 다른 병력이 없으신 분은 별로 보지 못했다.
왼쪽 서혜부 림프절 조직검사에서 진단된 kaposi's sarcoma는 Classic type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피부병변이 없다.

피부과 선생님은
지금 보이는 피부병변은 다 만성피부염 (40년 동안 피부병변이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한 병변이 있다) 이지 Kaposi's sarcoma가 아니라고 하신다. 조직검사 결과는 상당히 오래 있다가 리포트 될 예정이다. 내부 장기 침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PET-CT를 찍었는데, 복막 바로 아래 림프절이 하나 또 의심되는 게 있다. 이미징 검사라는 게 확실하지 않아서 그것도 애매하기 때문에 확인하려면 복강경 하 조직검사를 하는 게 맞겠지만 환자는 74세인데다가 관상동맥도 막혀서 스텐트를 두 번이나 넣은 경력이 있고 지금 아스피린도 드시고 계신다.

나는 피부든 복강 내 림프절이든 다 kaposi's sarcoma가 맞다 해도
지금 항암치료를 하는 것은 별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다.
classic type은 경과가 느리고 코스가 천천히 나빠지는 양상이기 때문에
환자 나이와 동반 질환을 고려하면
현재 아무 증상이 없으니 경과관찰 하다가 증상이 생기면 치료하는 게 어떨까 하는 것이 나의 판단 근거였다. 항암치료를 하게 되면 doxorubicin을 포함한 약제를 써야 하는데, 74세 노인이고 심장도 안 좋으신 분한테 이렇게 독성이 강한 약을 쓰는 게 이득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약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AIDS와 관련된 kaposi's sarcoma라면 코스는 급변할 것이다.
HIV 스크리닝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지만 잘못된 음성일 가능성은 없을까?
나는 병력을 꼼꼼히 물어보고 성 생활과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너무 심각한 질문은 환자에게 되도록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심각하지 않게, 74세 할아버지의 sexual activity를 확인해야 했다.

조직검사로 진단은 쉽게 되었지만
type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병력 청취가 꼼꼼하게 되어야 했고
암인데도 지금 당장 치료를 시작하지 않는 이유와
앞으로 검사 및 외래 추적관찰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들은 내가 말하는 것을 꼼꼼히 기록하였고
조금이라도 모르는 게 있으면 다시 질문하였다.
매일 회진은 1시간 가까이 걸린 것 같다. 오전에는 오늘 할 검사의 의미, 오후에는 결과 설명. 그 다음 계획. 그걸 다 영어로...

내 영어 실력이 짧은 것도 그렇고
의학적 경험이 짧은 것도 그렇고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탁월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라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할아버지와는 3개월 후에 만나기로 했다.
할아버지도 영어를 좀 하시는 편인데
몽고말을 못하고 지내니 너무 외롭고 쓸쓸하시다고 한다.
하루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신다.
아, 림프절들이 더 이상 자라지 말고 계속 그대로 머물러 있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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