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저한테 다니던 "L"이라는 분이 계셨지요. 거의 15년쯤. 그 분의 직업과 그 분의 가족들도 대충 압니다. 그 분도 저를 믿고 저도 그 분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지요. 그렇지만 어떤 때는 불편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다른 환자의 진료를 보고 있는 동안 전화가 와서는 뭔가를 의논하십니다. 물론 간단한 상담도 있지만 환자를 보기 전에는 대답할 수 없는 난감한 질문도 있지요. 게다가 환자가 없는 널널한 시간이면 상관없지만 검사와 밀려드는 환자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는 솔직히 전화를 받기가 (물론 진료 중에는 받지 않습니다. 진료가 마무리된 다음 제가 전화를 하지요.) 싫습니다.

얼마 전....그 날도 무척이나 바쁘고 정신없는 날이었습니다. 내시경실에서 대장내시경검사를 하고 있는데 (대장내시경검사는 오래 걸립니다. 그리고 대장내시경검사가 끝나면 대여섯 명의 대기 환자가 있기 일쑤입니다.) 밖의 접수대에서 말소리가 들립니다. "네? 4살이라구요?" "음...누군가가 소아과 환자를 데려오셨구나. 4살짜리를 내가 어떻게 봐?" 라는 생각으로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난 4살짜리 아기는 못 보니까... 소아과로 가시라고 안내하세요." 조금 후 들어온 간호사의 전언에 의하면 그 아기는 저한테 오랫동안 다니셨던 "L"이라는 분의 손자라는군요. 기침을 오랫동안 하는데 병원을 다녀도 잘 낫지 않아서 멀리 강남에서 일부러 오셨다고... 그냥 가시게 되어서 서운해하시더라고요. 뭐..어쩌겠습니까. 10살 정도의 아이라면 몰라도 4살이면....제가 약 용량도 모르겠고 잘 못 하면 그 아기에게 오히려 해를 끼칠 텐데...그리고 그 일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직원들의 표정이 안 좋습니다.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그 "L" 이라는 분이 저희 직원에서 화를 많이 내셨다더군요. 원장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문지기"인 너희들이 제대로 보좌를 못 해서 그렇게 아기를 그냥 돌려보낸 것이라고. 직원들, 늬들이 그만 두기 전에는 그 병원 다시는 안 가겠다고. 아니...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저도 순간 열이 뻗쳐서 전화를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들어는 봐야겠어서 차분히 여쭤봤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같더군요. "강남에서 거기까지 갔는데 서운했다" "소아과에 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자문을 구하려고 갔다" '진료를 안 봐도 그래도 아기를 한번 보고 얘기를 해주고 보내주면 안되었느냐" "원장님과 본인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니 지금 있는 직원들이 못 된 것이다"... 뭐 이런 말씀이더군요. "4살짜리 아기는 제가 봐도 아무런 얘기를 해 드릴 수 없을 것 같다" "그 때는 내시경실에서 검사 중이어서 나와 볼 수 없었다." "직원들이 잘 못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시켰다." 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영 들으실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그래도 우리 집 주치의신데...그러시면 안 되죠."라는 말씀에 제가  말씀을 뚝 끊었습니다. "저....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것은 고마운데 저는 그냥 평범한 의사입니다. 환자분의 주치의지 환자분 가족의 주치의는 아닙니다."

오늘 오후...한가한 시간에 할머니 한 분이 오셨습니다. 모 대학병원 피부과에서 아주 드문 케이스라고 하는 단순포진(?)을 진단받고 약을 드시는 분입니다. 이 분은 제가 그 대학병원 피부과로 보내드렸던, 그리고 다른 문제 때문에 몇 번 봤던 환자이지요. 그렇지만...피부과에서 치료가 어렵다는 분의 치료를 제가 할 수는 없어서 바로 위층의 피부과로 가시라고 안내를 해 드렸습니다. 접수단계에서 접수를 취소하고 올려 보낸 것이지요. 그런데 환자분은 위층 피부과에서 대기하는 틈에 따님이 제게 내려오셨습니다. 피부과 대기시간이 긴데 널널한 여기 내과에서는 왜 진료를 못 하는지 물어보려 오신 것입니다. 이만저만 해서...피부과 진료를 해야 한다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아, 물론 저희병원은 한가한 시간이었고...따님의 방문과 답변에는 10여분이 걸렸지만 아무런 진료비도 발생할 수가 없지요.

이 분의 따님을 만나면서...앞서 말했던 "L"이라는 분과 그 손자가 생각나더군요. 이런 시간에 만약 오셨다면 그래도 얼굴은 보고, 되든 안 되든 서운하지는 않게 해 드릴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하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역시 아기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터..-_-

환자분들은 제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드리는 편이라서 그런지 제가 한 번도 보지 않았던 가족이나 친척, 심지어는 친구의 병세까지 의논을 하시는가 하면.... 몇 번 답변을 해 드리다보면 가족의 주치의쯤으로 오해를 하시고 온갖 시시콜콜한(의료적이지 않은) 문제까지 상담을 하시는 경우도.

제가 시간만 많으면, 그리고 그 환자분에 대해 제가 잘 알고 있거나 제 전문분야라면 얼마든지 상담을 해 드릴 수 있답니다. 그렇지만... 다른 환자를 보느라 바쁘면, 그리고 제가 잘 알지 못 하는 분야에 대해 질문을 하신다면 그 것을 거절을 할 수도 있답니다. 제게 그런 것까지 상담을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제게 너무 기대가 많으신 것입니다. 제가 그 기대를 충족시켜 못 하더라도 실망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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