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지역암센터 주최 '암 희망 수기 공모전' 출품작

20년 전 연 10만여명이던 암 환자들이 현재 25만명에 이를 정도로 암 환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암 환자들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암은 이제는 예방도 가능하고 조기에 진단되고 적절히 치료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완치도 가능한 질환이 됐다. 이에 코리아헬스로그에서는 암을 이겨내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통해 다른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나의 투병 스토리> 코너를 마련했다. 이번 이야기는 광주전남지역암센터와 화순전남대병원이 공모한 암 환자들의 투병과 극복과정을 담은 수기 가운데 화순전남대병원에서 암 치료와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이야기들이다.

“악성 종양입니다.”

이 짧은 문장의 말에 주위의 소음이 모두 꺼지고, 나를 둘러싼 빛들이 어두워지며 차가운 한숨만이 선명해지는 듯했다.

41살의 나이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오른쪽 가슴에서 만져지는 딱딱한 덩어리. 마침 건강관리협회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이어서 예약을 하고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안심하고 있었지만, 시련이 다가오고 있음을 애써 부정하고 싶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주문을 걸고 있었다.

유방촬영을 하고, 초음파를 했다. 모양이 좋지 않아 조직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하셨다. 조직검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왠지 모를 눈물과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때 이미 일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낮에는 침착하게 직장 근무를 하고, 밤엔 어둠에 휩싸여 마음까지 어두워져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가는 아들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청소년기를 맞고 있었고, 함께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거리고는 속으로는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조직검사를 하고, 나흘이 지난 금요일 오후 근무 중 전화가 울렸다. 건강관리협회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이 의심할 여지 없이 너무나 자명했다.

“암이란 말인가요?”

“네.”

그 순간엔 아무 감각이 없어서 슬픔도 절망도 느끼질 못했다. 그저 내가 암 환자가 되었다는 걸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을 듣고, 전화를 끊은 후 침착하게 남은 일을 마쳤다.

퇴근하는 길을 걸으며 내가 믿는 하나님께 내 삶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죽음일지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무서웠다. 지금까지 나와 사랑하는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성을 지으려고 쌓고 있던 벽돌들이 붕괴되고, 행복했던 시간들이 아득히 먼 곳에서 고개를 숙이며 작별의 인사를 하고 있는 듯했다.

집에 돌아와 아들의 모습을 본 순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가족들이 보지 않는 곳을 찾아 들어가 몰래 울며 그동안 힘들었을 나를 안아주었다.

1년 동안 감기에 한 번 걸리지 않고, 태어나서 40여 년을 살면서 아파서 병원에 간 일이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건강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건강할 거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만은 허락하실 거라고 믿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생각해보면 몸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 가족들 아침을 차려주고는 나는 대충 미숫가루로 때우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저녁 식사 준비가 어려울 정도로 피곤했는데, 나를 좀 들여다보라고 하는 그 울부짖음을 외면했다. 아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내 몸을 꽉 끌어안으며 다독거렸다.

조직검사 결과 전화를 받은 그다음 날 건강관리협회에 방문해서 앞으로의 진료에 필요한 서류를 받고, 산정 특례 신청을 했다. 산정 특례에 대해 들었을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고마움을 느꼈다. 산정 특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정말 아찔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의료혜택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존엄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장치였다.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과도 같다.

2022년 1월부터 화순전대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마친 후 3월 초 처음 교수님 진료를 보는 날까지 유방암 1기나 2기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슴 한쪽에서 실체를 알 수 없는 단단한 뭔가가 만져지기만 할 뿐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암에 걸린 일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도 차근차근 신변을 정리하고, 가족들에게 알리며 마음의 정리를 해나갔다. 드디어 교수님을 처음 뵙고 결과를 듣는 날, ‘2기까지는 괜찮아’하면서 어떤 일에도 웃음을 잃지 않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유방암 3기 초라는 결과를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크기가 크고 림프절 전이까지 되어서 전절제를 해야 하는데 아직 젊은 나이이니 부분절제를 위해 항암을 먼저 하자고 하셨다. TV에서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들어보던 ‘항암’.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항암치료가 나의 일이 되는 순간이었다.

항암을 하면 10명 중에 대다수는 암 크기가 줄어들고, 1~2명은 더 커지고, 1~2명은 완전히 제거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나는 항암 하는 동안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줄어들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하지만 항암을 잘 견뎌내는 것이 내가 살 길이었다. 그리고 6번의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이길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건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의 걱정어린 진실한 응원과 격려였다. 날 지지해주고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이웃들이 없었더라면 나와 내 가족이 견뎌야 하는 고통의 무게는 더 무거웠을 것이다. 

항암치료 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이 항암 주사를 맞고 일주일간 지속되는 메스꺼움과 구토 증상이었다. 신체 변화도 왔다. 첫 항암 주사를 맞고, 2주가 지날 즈음 머리카락이 조금씩 빠지더니 한 움큼씩 아무 감각 없이 빠졌다. 놀란 나는 모자를 쓰고, 미용실로 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미용사가 위로해주며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깎아주었다.

“꼭 회복되실 거예요. 치료 잘 받으세요.”

평범한 말이지만 힘이 되고, 따스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거울에 비친 민머리가 된 나의 모습이 낯설고, 슬프게 보였다. 거울 속에 있는 여자가 나를 바라봤다. 슬프게 바라보는 내가 너무 보기 싫어 표정을 바꾸어 웃어보았다. 항암이 끝나면 머리카락은 다시 나올 것이란 걸 알기에 희극으로 바꿔 바라보기로 했다. 삶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란 말이 있다. 살면서 언제 내가 민머리가 되어 보겠는가. 이런 경험이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슬퍼하는 것은 삶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항암을 시작한 계절이 ‘봄’이었던 것도 좋았다. 산수유, 동백, 벚꽃, 수국이 피는 곳을 찾아다니며 조물주의 아름다운 솜씨에 눈이 즐거우니 덩달아 마음도 즐거웠다. 또한,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의 건강한 에너지가 내 안에 충전되는 듯했다. 시간 날 때마다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 남편에게 지금도 고마움을 느낀다. 내년 이맘때쯤엔 건강한 몸으로 꽃들과 다시 만나기를 기도했다.

항암 주사를 맞으면 일주일간 잘 먹지 못했다. 속에서는 음식을 받아주지 않는데 배가 고팠다. 그러다가 머릿속에 ‘이 음식을 먹으면 넘어갈 것 같다’는 음식이 떠올라서 먹으면 다행히 속에서 받아주기도 한다. 잘 먹고, 운동하고, 햇빛을 쬐어야 항암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더라도 잘 먹으려고 노력하고,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공원을 걸으며 몸을 움직이고, 햇빛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또 한 가지는 많이 자주 웃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소리 내어 웃었다. 우울한 감정들이 날아가고 몸이 긍정적 에너지를 받을 수 있도록 자주 웃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 웃으면 건강에 좋다는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건강에 좋으려면 부교감신경이 활발해야 하는데 이때 부교감신경을 활발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웃음’이라고 한다. 긴장하는 것이 교감신경을 활발하게 해서 좋지 않으니 이 긴장을 풀게 하는 것이 ‘웃음’이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웃을 일이 없으면 억지로 웃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소리내어 웃는 것이 부정적 감정을 날리는 데에는 특효약이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평소에 많이 웃고 살았을 테고, 암이 내 몸 안에 자라날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건강하지만,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이고,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분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암’을 겪으며 깨달은 한가지는 삶이 무겁다고 해서 언제나 힘든 표정으로 사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삶이 무거워도 웃는 표정으로 산다면 삶이 좀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삶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고,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지만, 표정은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니까.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는 건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으로 바꾸며 살자고 다짐했다. 항암을 하며 힘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힘들 때 애써 소리내어 웃으면 희망적인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6번의 항암을 견디는 동안 얼굴이나 손등, 발등의 살갗이 거무스름해지더니 손톱과 발톱 끝까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때로는 건강했던 예전이 사무치게 그리워 울기도 했다.

마지막 항암을 마치고 다리가 붓고, 체력은 바닥이 났다. 늘 튼튼한 다리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푸른 공원을 단단하게 걸어 다녔는데 항암치료가 끝나고 몇 주는 힘이 풀린 다리로 희망 없는 사람처럼 길고 긴 공원을 느릿느릿 거닐어야 했다. 몸 상태가 기분을 좌우하고, 무기력하게 있을 때면 TV만 멍하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가 힘이 나게 했다. 사람에게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항암치료 결과는 아주 좋았다.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크기가 많이 작아진 것이다. 많이 작아진 것만으로도 기뻤다. 수술 날짜까지 체력은 회복되어갔다. 수술은 두렵지 않았다.

수술 전날은 날씨가 흐렸다. 그래서인지 그날따라 마음이 무거웠다. 입원실에 낯선 분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외로움도 느꼈다. 하지만 입원실에 함께 계신 분들과 어느새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고충을 토로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수술 당일 같은 날 수술하는 분들과 서로에게 수술 잘 받고 오시라며 인사를 나누고, 수술 시간을 기다렸다. 난생처음 받는 수술에 몹시 긴장되었다. 침대에 누워 수술방으로 옮겨지고, 마취가 되어 눈을 감는다. 수술이 끝난 후 마취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밀려오는 어지러움과 구토증세. 수술받고 난 당일은 목마름과 배고픔을 참아야 했지만, 고난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진리다. 모든 건 인내한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수술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할 때의 그 감사함. 주린 배를 채웠을 때의 그 온기. 긍정적인 단어들은 말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감사가 된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건강, 머리카락,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걷는 것, 입맛, 공기, 바람, 햇빛. 이 모든 것이 감사가 되었다.

수술 후 조직검사 결과를 듣고 향후 치료 방법을 듣는 날이 되었다. 놀라운 날이었다. 조직검사 결과 암이 없었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항암치료가 끝난 후 남아 있었던 것은 암의 사체 같은 것이었다고, ‘완전 관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을 때 교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림프절 전이도 없었다니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다. 앞날이 희망적이었다.

방사선 치료까지 모두 마친 지금.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봄부터 여름까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회상해보니 나의 인내가 값지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많이 힘들었지? 잘 견뎠어. 은미야! 고생했어.’

사람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명한 이치다. 나는 마흔이 되어 죽음과 친구가 되었다. 생명이란 건 존엄하기에 그 끈을 쉽게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암을 이겨내어 살려고 한다. 극복해야 할 것은 암보다 굴복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이었다.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게 여길 것이다. 병이 날 잠식하지 못하도록 건강한 삶을 살 것이다. 되도록 사는 날 동안 누군가를 미워하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에 내 거대한 삶을 소모하지 않을 것이다. 되도록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할 것이다.

예전처럼 체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노고단까지 올랐던 그때의 체력으로 돌아간다면 아니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남편, 아들과 함께 무등산 입석대까지 쉬엄쉬엄 올라보기로 약속했다. 머지않아 중봉에 억새가 물결칠 때 오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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