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지역암센터 주최 '암 희망 수기 공모전' 출품작

20년 전 연 10만여명이던 암 환자들이 현재 25만명에 이를 정도로 암 환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암 환자들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암은 이제는 예방도 가능하고 조기에 진단되고 적절히 치료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완치도 가능한 질환이 됐다. 이에 코리아헬스로그에서는 암을 이겨내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통해 다른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나의 투병 스토리> 코너를 마련했다. 이번 이야기는 광주전남지역암센터와 화순전남대병원이 공모한 암 환자들의 투병과 극복과정을 담은 수기 가운데 화순전남대병원에서 암 치료와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이야기들이다.

스물네 살, 누구에게는 꽃다운 나이란다. 그런데 나는 겨우 병상 위였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꿈을 향해 직진하던 20173월 어느 날, 엄청난 허리의 통증과 함께 오른쪽 다리의 마비로 쓰러져 전남대병원 응급실에서 몰핀을 맞는데도 너무 아파 펑펑 우는데, 저쪽에서 의사 선생님께서 우리 엄마를 부른다. 그때의 전율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한다. 맙소사. 암세포 68%백혈병이란다. 그렇게 나는 급성골수성백혈병(AML2)을 진단받았다.

73 여미병동에 처음 들어서는데, 머리카락이 없으신 환자분들을 보고는 병상에 앉아 펑펑 울었다. 이럴 수가. 세상이 원망스럽고 싫었다. 모든 게 무너졌다. 왜 나에게 이런 어마무시한 병이 왔냐고 매일같이 눈물만 쏟아냈다. 기약이 없음을 알고 엄두가 안 났다.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항암제는 누군가 고통을 주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인지 내가 가장 혐오할 만한 부작용만 골라서 비처럼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손이 부어서 물건을 잡을 수도 없고, 손발의 끝에선 더 이상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잃고, 피부는 점점 검게 타고, 손발톱이 부서졌다. 외모를 크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대학생이나 되었는데, 엄마 품에 안겨 정말이지 펑펑 울었다. 거울 속엔 다른 사람이 있었고, 하루 종일 더 이상 위액조차 나오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구토에 시달리다가 힘없이 푹 쓰러져 간신히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엄마 나 좀 아픔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 줘…엉엉.

무언가를 삼키려면 한동안 노려보고 있다가 침을 여러 번 삼켜 토하지 않을 확신이 들 때 겨우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었다. 살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알약 스물세 알을 억지로 삼키다 보면 웃음이 나왔다. 인간이라면 노력하지 않아도 당연히 작동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 삼키고 싸고 자는 모든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아예 먹통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내가 정말 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며 매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오늘 밤은 부디 덜 아프기를 닥치는 대로 아무에게나 빌었다. 창밖에 피어나는 예쁜 꽃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창문 너머 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가 부러웠다.

어린아이들을 위해 매일을 애쓰며 독한 항암치료를 버티는 엄마들부터암 병실에는 여기저기 사연이 많다. 그런데 나는 내 삶에 용기가 나질 않더라. 한순간이라도 쉽게 내 마음대로 된 적 없던 지난 24년간의 내 인생, 도대체 내 인생에 어떤 화려함이 묻어나 보자고, 왜 이런 무지막지한 고통까지 받아 가며 하루를 더 살기 위해 이 수많은 항암제들과 싸워 이겨내야 하는가. 어느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수많은 고뇌 속에, 나의 항암치료는 계속해서 실패했고, 호중구(중성구)0인 상태로, 결국 의학적 관해가 되지 않은 채로 재발률 60%라는 팩트를 떠안고 조혈모세포 이식을 위해 82병동 무균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의 약 30여 일은 정말이지 처음 경험하는 감옥 같았다. 해가 뜨지 않기를 바랬다. 해가 뜬 오늘이 너무 길어서 울부짖었다. 엄마가 점심 저녁 먹으러 나가실 때 그 혼자가 된 시간이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정말 혼자가 될까 봐이렇게 가장 어둡고 깊었던 그 밤들을 버티고 이식에 성공하고 바깥세상에 나왔는데, 그 행복도 잠시갑자기 혈액수치가 이상해서 골수검사를 하고는, 암세포 6% 재발 판정.

3개월 만에 모든 내 세상이 또다시 무너졌다. 화순전남대병원 로비에서 주저앉아 정말이지 세상 떠나가게 울어버렸다. “더 이상은 싫어, 엄마하고는 엄마에게 소리쳐버렸다.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은데, 돌아버리겠는데 그래도 다시 한번 엄마 아빠를 위해 한 번만 더 해보자고 결심하고 다시 관해를 위한 힘겨운 항암치료를 하는데, 암세포는 22%로 늘었단다. 내성이 생겼단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항암제가 없네요. 전신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다시 이식 공여자를 찾기 위해 시간이 지체되었고,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면 그래도 가슴 졸이는 그 시간이 덜 괴로운 듯하였다. 그땐 그랬다. 신이 있다면, 신은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준다는데, ‘엉엉저는 이제는 도저히 못 하겠어요, 그냥 저 좀 데려가 주세요. ,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하겠단 말이에요’. 하루라는 시간이 더 이상 내겐 그냥 선물 같았고, 눈을 감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내일이 오지 않을까 봐. ‘혹시라도라는 맘에 매일 노트북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갇혀버린 시간 속에서 육체가 지배하는 내 정신이 한없이 약해지는데, 그런데 나란 사람은 그 무지막지한 항암, 전신방사선치료를 견뎌내며 살고 싶다고 울부짖더라. 그런 나를 신은 살려주셨다. 기적이라는 게 내게 일어났다. 7번의 항암치료와 6번의 전신 방사선치료 그리고 2번의 조혈모세포 이식 성공은 나에게 다시 의 기회를 주었다.

2번의 이식 후, 나는 어마 무시한 이식편대숙주반응(GVHD)으로 온몸의 살결이 벗겨지는 피부숙주,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매웠던안구숙주, 후추와 물에 씻은 김치조차 먹지 못하는 구강숙주, 간숙주를 거쳐, 현재는 호흡기장애 1급의 폐숙주를 겪고 있다. 항암 부작용과 스테로이드 부작용, 숙주반응 하나하나를 겪으면서, 도대체 이 병은 언제까지, 어디까지 날 괴롭힐 거냐고, 매번을 울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가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을 고뇌하던 병원 생활 14개월, 아픔은 내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이기는 법을, 아니지, 이겨내야만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픔은 내 예쁜 20대 청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야속하게도 많은 것을 빼앗아갔고, 이제는 ‘of 건강, for 건강, by 건강이란 마인드로 나의 꿈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뒤흔들어버린 지난 2년의 투병기간을 지나, 2020년 스물일곱 살을 살아가는 나는 나를 구해준 이 세상에게, 사람 냄새 가득한 사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며 다시 을 향해 직진 중이다.

아프니깐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지 않고 이겨내는 야무진 청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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