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관리청 제1회 '희귀질환 극복수기 공모전' 출품작

희귀난치병 환자들은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기까지 평균 5년 동안 병원을 8번 정도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진단에 성공하더라도 제때 정확한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질병관리청은 희귀질환에 대한 대국민 인식도를 제고하고 희귀질환자들의 정서적 지지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제1회 '희귀질환 극복수기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번 공모전에는 총 25편의 수기가 접수됐다. 이에 코리아헬스로그는 희귀질환자들이 질환을 극복해 나가는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희귀질환 극복수기 공모전에 도전한 다양한 환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편집자주>

저는 어릴 때부터 폼페병을 앓아 몸을 제대로 겨누지 못했습니다. 폼페병은 에너지원인 포도당을 저장하는 글리코겐이 분해되지 않고 축적되는 유전성 당원축적병입니다. 초등학생 때는 막연히 유전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까 두려워 그 병에 대해 최대한 숨기곤 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약하다는 것에 대해 노력이 부족하다는 질책을 받거나, 단지 그러한 사실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배제되고 소외되는 것만큼은 면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그걸 빌미로 저에게 의도적으로 폭력을 일삼는 또래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프고 어두운 과거 때문에 저는 사랑보다는 증오를 먼저 배우고, 희망보다는 좌절을 느꼈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심리일지 모르지만, 외면적으로 고통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저의 시선은 항상 제 내면을 향해 있었고, 독서나 글쓰기와 같은, 제 내면을 진실 되게 드러내는 언어 관련 분야에 대한 탐구열은 그것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생 시절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 문법에 막연한 흥미를 느껴 틈이 있을 때마다 국어 문법서에 머리를 밀고 들어갈 듯한 열의로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제게 건넨 손이 저를 ‘언어학자’의 꿈으로 인도해주었다고 느낍니다. 

그는 제가 언어학에 지극히 탐구적이었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해주었으며, 이전에 만난, 제가 증오를 품었던 사람들과는 달리 저를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존중해주었습니다. 주변에 그렇게 저를 인정해주는 친구들이 점차 한 명 한 명 모여들었고, 덕분에 저는 그들에게 있는 그대로 사랑받았습니다. 그러한 사랑이 모여서, ‘언어학자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정말 좋아서 ‘단순히 언어학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실존적 의미에 있어서 언어학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저는 문득 저의 옛 시절을 회상하고는 하였고 그럴 때마다 제 친구들에게 받았던 사랑과 관심을 혼자서만 누리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을, 어린 시절의 저처럼 가슴 한편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친구들과 대화하며 서로 통하는 유대감을 느꼈던 이후로 생각했던 것은, 생각과 감정 전달의 원천이 바로 언어에 있고, 의사소통에서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를 통해 가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제 마음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습니다.

그 꿈을 마음에 품은 채, 그리고 여전히 신체적 불이익을 짊어진 채 저는 ‘대학교 입시’라는 관문에 들어섭니다. 저는 남들보다 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방과 후에 학원에 출석하여 수업을 듣기가 굉장히 번거로웠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스스로 내용을 이해하고 문제를 풀이하는 것이 저의 주된 공부 방식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물론 일직선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길을 몇 번이고 약도를 확인하며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에, 학습 속도의 측면에서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홀로 공부하려면 아무래도 의지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면에서 처음에는 미숙할 수밖에 없었고, 몇 번이고 좌절을 거듭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는 제가 공부하는 것의 궁극적인 이유인 ‘언어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리고 그 꿈의 초석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공부하는 것을 통해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굳힐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능력이 거듭 강해져, 일직선으로 온 경우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해져서 결국에는 명문대학교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 입시의 배후에는 저를 위협하는 또 다른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명문대학교에 합격하고 나서 한창 행복을 만끽해야 할 시기였지만, 저는 이상스레 저조차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니면서도 입시를 준비하느라 재활에 무심해 왔었던 저는 다리가-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불편해져 마음껏 움직일 수 없었고 그것은 마치 사슬에 얽매인 것과 같은 정서적 고립감과 패배감을 주었습니다. 항상 밝게 웃고 떠드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고 그들처럼 되기를 원했지만, 신체적인 제약은 교제와 도전 정신에 있어서도 저를 과거와 같이 침체시켰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저를 비교하게까지 했고, 그럴수록 위축감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결국에는 제 몸을 휠체어에 주저앉힐 때까지 사정없이 짓눌렀습니다. 동시에 저는 수면 장애에 시달리기까지 했습니다.

이상하게 눕기만 하면 호흡 곤란이 와서 자다가 중간에 몇 번이고 깨는 것은 물론이고, 이상스레 낮에는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저는 쓸쓸하게도-그 압도적인 심적 고통을 ‘쓸쓸하다’라는 단어 하나로 대신시켜 놓는 것이 표현에 있어서 무언가 부조리하다고 생각되지만-제 눈동자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졸음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 간의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제가 교제와 만남 속에서 행복감을 잃어버렸을 때의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가진 우울감은 부모님께도 전이됐습니다. 

어머니는 고깃집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대화도 제대로 못 하고 졸기만 하는 저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해 보려고 애썼지만, 그 어떤 병원도-수면 클리닉도, 재활의학과도, 정신과도, 심장내과도-그 해결책을 찾아주지 못했습니다. 병원이란 병원은 전부 다녀봤지만, 그 어떤 병원에서도 저를 감싸고 도는 안개를 거두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호흡 곤란과 고열에 시달리게 되어 결국 아버지는 응급차를 불렀고, 저는 들것에 실려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실려 가는 도중 의식을 잃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중환자실에 도착해서야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폼페병이 호흡근에도 영향을 미쳤기에 지난 몇 개월 동안 제 호흡 능력이 악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체내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증가했고 그 영향으로 인해 집중력과 체력이 약화하거나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는 등 일상 속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그 수준이 중환자실에 오기 전에는 죽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단 것은 정말 다행이었지만 그 길은 저를 살리는 길임과 동시에 저를 시험하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큰 수술을 두 번이나 거쳐야 했고 그것은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들의 응원과, 또 제가 걱정 않고 모든 의료 과정을 견뎌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준 의료진분들의 노력이, 제가 그 역경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가 호흡을 위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과정이 매우 괴롭고 답답해서, 시도할 때마다 매번 1분도 못 버티고 포기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성공해내지 못하면 영원히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채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 자체는 외면하고 싶었지만, 저는 제게 진심 있는 사랑과 관심을 줬던 친구들 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깥의 세상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저는 그들이 기억하는 제 목소리를 통해 진심으로 인사하고만 싶었습니다. 그 간절한 바람 덕에 저는 결국 자가 호흡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만난 사람들은 저를 예전의 저로 대해 주었고, 그러자 저는 예전의 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저를 향한 진심 어린 응원과 기도에 보답해줄 수 있었고 이 기쁨을 함께 이뤄낸 것이라 느꼈기에 더욱 행복했습니다.

길거리의 나무들은 봄에는 화창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만, 그러기 위해선 혹독한 겨울을 참아내야 합니다. 겨울이 필연적으로 찾아오고 또 필연적으로 물러가듯, 이 질병이 저에게 주었던-정신적, 육체적인-모든 아픔들은 전부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사람들을 더 낮은 자리에서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우리들’이 함께 힘을 모아 이 앞에 놓인 여러 시련들을 견뎌내고 이겨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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