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지역암센터 주최 '암 희망 수기 공모전' 출품작

20년 전 연 10만여명이던 암 환자들이 현재 25만명에 이를 정도로 암 환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암 환자들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암은 이제는 예방도 가능하고 조기에 진단되고 적절히 치료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완치도 가능한 질환이 됐다. 이에 코리아헬스로그에서는 암을 이겨내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통해 다른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나의 투병 스토리> 코너를 마련했다. 이번 이야기는 광주전남지역암센터와 화순전남대병원이 공모한 암 환자들의 투병과 극복과정을 담은 수기 가운데 화순전남대병원에서 암 치료와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이야기들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올해 만큼은 더는 덕담이 아니었다. 추석에 가족이 다 같이 모여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너희 이모가 많이 안 좋다는구나.”

어머니는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이모는 최근에 살이 급격히 빠졌다. 이모를 두고 주위에서 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이모는 그때마다 ‘알았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랬던 이모가 불안했는지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는 ‘화순전남대병원’에 가라고 소견서를 써 주고 예약까지 잡아줬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암’이라고 이모들은 생각했다. 올해가 다 같이 모일 마지막 추석일지 모른다며 코로나 방역이 완화된 요즘 외갓집에서 다들 모이기로 약속했다. 어머니는 점심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침부터 마른기침을 계속하는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는 형과 함께 시골에 내려갔다.

아버지와 거실에 앉아서 티브이를 봤다. 채널을 돌리다가 문득, 3년 전 암 진단을 받았던 당시의 아버지가 궁금했다.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던 난, 오늘에야 물었다.

“건강검진에서 ‘폐암이 의심된다’라고 했을 때 어땠어요?”

아버지는 갑작스런 물음에 길게 침묵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더라. 앞에 의자가 없었으면 무릎이 꺾여서 휘청했을 거야.”

아버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처음엔 의심했다. 담배 끊은 지가 20년이 지났는데 폐암이라니 당치도 않아. 하지만 화순전대병원에 예약을 하고 건강협회를 나와서 한낮에 2월의 찬바람을 맞는데 이게 진짜 같은 거야. 그 뒤로 집에 가는 길 내내 '정말 폐암이면 어떡하지' 하고 무서워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집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없어.”

그랬다. 건강협회를 나와서 집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침묵했다. 아마도 제각각 침묵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또 받아들이려 애썼을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도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저녁에 퇴근한 형을 안고 아버지는 울었다.

“그때 왜 그랬어요?”

아버지는 짐짓 시치미를 뗐지만 이내 말했다.

“집에 가는 길에도 집에 와서도 내내 너희들이 눈에 밟혔다. 너희들을 두고 내가 어떻게…”

아버지는 ‘최악’을 생각했다. 폐암이 의심된다는 말에 당신은 당신이 없는 빈자리를 걱정했고 아직 여의지 못한 자식의 앞날을 또 걱정했다. 쌓이는 근심을 참지 못한 아버지는 형을 보자 순간 울컥했던 것이었다. 그때 나 역시 울컥해서 말없이 형을 안고 울먹이는 아버지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우려대로 폐암을 진단받았다. 2기였다. 수술은 순조로웠는데 수술실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또 울었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눈물이 많았고 겁이 많았다. 막내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덩달아 막내도 울었다. ‘수술하면 낫는데 뭐시 걱정이다요’ 엄마는 그런 아빠를 달랬는데 엄마의 눈시울도 붉었다. 당시 아버지는 수술실 들어간 뒤에 우리를 더 이상 볼 수 없을까 두려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작은 두 눈으로 쉴 새 없이 우리들과 눈을 맞췄고, 또 마음속에 담으려고 애썼다고도 했다.

퇴원 후 아버지는 서서히 일상에 복귀했다. 당신의 건강은 느리지만 회복 중이었는데, 정기검진 때 기흉이 발견돼 입원하고, 설상가상 염증까지 생겨 33일이나 입원 후에야 퇴원했다. 입원 중 아버지는 각종 항생제를 맞았다. 항생제에 기력이 꺾이고 정신까지 꺾인 아버지는 2주 가까이 침상에만 누워있었다. 누워서 보대꼈고 보대끼다 겨우 잠들었다고 한다. 화를 많이 냈고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병문안을 갈 때마다 ‘먹어야 산다’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며 식사를 거절했다. 때문에 아버지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끊었던 식사를 시작했다. 침상에 누워있지 않고 움직였다. 입원한 지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당시의 상황을 아버지에게 물었다.

“염증 치료한다고 맞는 항생제에 내가 먼저 죽겠지 싶었어. 더 살아서 뭐 하냐는 생각도 했어.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말이야. 또 살고 싶더라. 살고 싶었어. 너희들을 두고 이대로 갈 수가 없었어. 아마도 그때부터였지. 밥을 먹기 시작한 때가. 마침 항생제 개수도 줄던 시기였어.” 

아버지는 눈에 띄게 기운을 되찾았고 퇴원했다. 다만 수술 후 2개월이 지나 항암치료를 받지 못했다. 당시 항암치료를 받지 못 한 일을 두고 가족 내 의견이 갈렸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는 건강하다. 6개월마다 있는 정기검진에서도 예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매일 운동한다. 오늘은 이만큼 걸었다고 스마트폰을 내밀 때면 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난다. 나이가 들면 아이 같아진다더니 아버지는 장난이 더 많아졌다.

피곤하다는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쉬이 피로한 까닭에 자주 눕고 자주 잔다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바로 잠들었고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하늘은 맑았고 가을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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