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과학연구소 권귀영 병리검사부문장(병리과 전문의)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일으킨 변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의료서비스 분야에서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가속화가 있다. 환자와 의료진이 직접 만나서 의료서비스가 이루어지는 개념은 이제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ICT 기술의 발달로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디지털 데이터를 이용하여 비대면 형식으로 진행하는 의료서비스가 점차 확산하고 있다. 또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새로운 의료 기술들이 현장에 적용될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조직 검사를 통해 얻은 검체를 데이터화하는 것이다. 이를 의료계에서는 ‘디지털 병리’라고 부른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병리’란 병의 원인이나 발생, 경과 따위에 관한 이론을 뜻하는 말이다. 병리과에서는 이에 대한 기록까지를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조직 검사를 통해 얻은 검체를 통칭하며, 디지털 병리는 이를 디지털화하여 데이터로 생성한 것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병리과에서는 진단 또는 치료 목적으로 채취한 환자의 조직 검체를 유리 슬라이드로 만들고 이를 현미경으로 판독하여 보고서로 작성하는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전자의무기록(EMR, Electronic Medical Record)을 활용하는 추세에 맞춰 디지털 병리를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 병리는 기존과 달리 유리 슬라이드 내용을 스캔해 그대로 디지털 이미지화 한 후 컴퓨터 모니터로 판독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병리 개념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이나 아날로그 방식의 유리 슬라이드를 해상도 높은 이미지로 만드는 기술, 파일을 저장하고 불러올 수 있는 서버 등 관련 인프라가 구축된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상용화되기 시작했고, 이후 코로나19를 겪으며 비대면 의료 서비스 방식, 데이터 전송의 용이성 등을 이유로 디지털 병리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아날로그 방식의 병리 진단 흐름을 살펴보면 ‘유리 슬라이드 제작-현미경 판독-자문-보관’ 등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 이후 환자가 치료를 위해 타 병원으로 옮길 경우 유리 슬라이드 재염색과 운송 등 추가 과정이 필요한데, 이때 분실이나 파손 등의 위험성이 있다.

하지만 디지털 병리가 적용될 경우 이런 번거로운 절차 없이도 스캔 이미지를 데이터로 처리하여 CD 등 저장 매체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 전달의 편의성뿐만 아니라 반납이라는 번거로운 절차도 줄일 수 있다. 과거에는 환자가 유리 슬라이드를 1차 기관에서 찾아 2차 기관에 전달했다가 이를 다시 반납해야 했는데 이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추후 온라인 의료데이터 활용과 접목이 되면 어디서나 편리하게 조회 및 자문이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한 예로, 60대 환자가 2차 기관에 제출하기 위해 자신의 병리 기록을 담은 유리 슬라이드를 대여한 적이 있었다. 절차가 복잡해서 신청하기도 어려웠지만 대여를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등 불편한 점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환자가 이를 직접 2차 기관에 전달하려다가 유리 슬라이드를 분실하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만약 디지털 병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디지털 병리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자문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어떤 병증인지 판독하기 어려운 경우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게 유리 슬라이드를 보내 자문하는 방식으로 진단의 정확도를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의견을 받을 때까지 진단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병리를 사용할 경우 이미지로 된 데이터를 인터넷으로 전송하거나 공유할 수 있으므로 환자 진단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또한, 다수의 전문가에게 동일한 슬라이드 이미지를 보여 자문할 수 있어 진단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그 밖에도 여러 인공지능(AI) 분석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경우 슬라이드 이미지를 수치화된 데이터로 분석하여 병리 의사의 진단에 보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정확한 진단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기존의 바이오마커(질병이나 노화 따위가 진행되는 과정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생물학적 지표가 되는 변화) 데이터와 연계를 통해 새로운 바이오마커를 발굴하는 연구에도 활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한 병리 이미지 데이터와 AI 분석 소프트웨어를 접목한 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연구 결과를 환자 진료에 활용하면 더욱 정확하고 편리한 진료가 가능해지고, 환자 맞춤형 진료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일부 대형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디지털 병리가 사용되고 있으나, 아직 전국적인 단위에서 보면 이제 시작 단계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디지털 병리 인프라와 시스템이 구축되어 병원 간 디지털 병리 데이터 공유 및 활용이 용이해질 것이다. 병리 진단의 발전과 이를 통한 의료 서비스의 질 향상으로 환자 진료에 밝은 미래가 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SCL 서울의과학연구소 병리검사부문을 이끌고 있는 권귀영 부문장은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병리 전문의이다.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임상강사 및 중앙대학교병원 병리과 진료조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코리아헬스로그 자매지 청년의사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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