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과대학 분당차여성병원 소아청소년과 유한욱

현대의학은 환자의 치료 및 관리에 있어서 건강관련 삶의 질((HRQoL: Health related quality of life)과 환자 자신의 평가 보고(Patient reported outcome: PRO)를 매우 중요시 여긴다. 희귀질환의 임상시험에서도 치료 및 중재 효과를 평가하기 위한 임상 평가 변수의 하나로 사용하기도 한다. 진료현장에서는 다양한 목적으로 이 지표들을 전자의무기록에 통합하려는 추세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제공하는 삶의 질 간편형 척도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영역을 평가한다. 1)신체적 건강 영역: 통증과 불편 정도, 에너지와 피로도, 수면과 휴식의 양과 질, 움직임, 일상생활의 활동성, 의약품이나 치료 등에 대한 의존성, 일할 능력 2)심리적 영역: 긍정적인 느낌, 사고, 배움, 기억, 집중력, 자아 존중감, 신체적인 이미지와 외모, 종교, 영성, 신념 3)사회적 관계 영역: 사회적인 지지 4)환경 영역: 환자의 이동성, 의료적인 돌봄, 사회적인 돌봄, 새로운 정보기술의 획득 기회, 여가활동의 기회 등이다. 

희귀질환의 종류에 따라 삶의 질은 천차만별이나 대부분의 희귀질환 환자들은 지적 및 발달장애를 동반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들은 만성적으로 환자와 가족에게 고통을 주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중증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환자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가족들의 삶의 질을 현저히 저하시킨다. 그러나 희귀질환들이 너무 다양해서 각각의 질환에서 환자와 가족들의 삶의 질이 어떠한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희귀질환 환자들이 정확한 진단을 받게 되는 순간 부모나 가족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나요? 치료방법은 없나요? 왜 하필 우리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부모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누가 돌보아 줄 까요? 가족에서 재발할 위험은 어느 정도인가요? 등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는 부모 자신들의 유전적 잘못으로 기인했다는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희귀질환의 진단은 종양질환의 진단 만큼이나 의사에게 있어서는 “나쁜 소식 전하기”인 셈이다. 

유전상담사를 포함한 의료진의 사회심리학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나 우리나라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우리나라는 유전상담사라는 직군이 아직 제도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제한된 시간에 많은 환자들을 진료해야 하고 때로는 의사 자신도 처음 경험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희귀질환에 관한 설명을,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환자와 가족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돌봄(care)을 제공하는 가족의 태도를 보면 부모 중 한 명이 전담하여 그야 말로 독박으로 희귀질환 자녀에만 올인하는 경우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부담되어 가정 내에 방치되거나 은폐되는 극단적인 방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전자와 같이 너무 편향된 돌봄의 경우에는 돌봄 제공자(care giver)가 극심한 스트레스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하게 된다. 종종 정상적인 자녀와 가족이 방임되거나 가정이 해체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치료방법이 있거나 조기에 의료적 개입이 되면 예후가 달라지는 질병인 경우 치료기회를 놓치게 되어 환자의 삶의 질은 더욱 악화하게 된다. 어떤 극단의 경우도 건강하지 못한 돌봄이라 할 수 있겠다.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의료진과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개입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자조모임, 또는 환자변호단체(Patient Advocacy Group)의 활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서 동변상련의 감정을 공유할 뿐 아니라 새로운 정보도 접하고, 돌봄제공자의 건강한 휴식도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다양한 희귀질환의 자조모임들이 활발해 지고 있다. 새로운 조기 진단방법(예: 신생아스크리닝, 새로운 생물학적 지표의 발견, 유전체 분석법 발달)이나 재활치료(예: 디지털기기의 활용), 수술방법(장기이식), 치료제(예: 생물학적제제, 저분자 화학물질, 유전자 치료제)가 개발되면서 환자들의 수명이 연장되고 삶의 질이 개선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필자는 희귀질환을 잘 극복한 수많은 사례들을 경험하고 있다. 프라더-윌리 증후군 환자들은 매우 꼼꼼하여 사실적인 그림을 매우 잘 그릴 수 있는데 어떤 환자는 뛰어난 재능으로 사실화를 잘 그려서 개인전을 하고 미술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한 경우도 있다. 5번 염색체 단완이 결실된 묘성증후군 환자는 상모돌리기를 너무 잘 해서 사물놀이패와 공연도 한다. 파브리병을 지니고 치료받으면서 활동하는 여러 의사 선생님들도 있다. 

며칠 전에는 반가운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지난 십여 년간 진료하면서 멘토 역할도 해주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금년에 대학에 진학하는 윌슨병 환자였다. 국내 최고의 S대 의과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본인도 희귀질환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되겠다는 당찬 결심을 보내왔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희귀유전질환을 돌보는 의사의 큰 기쁨이다. 새해에는 이런 반가운 소식들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분당차여성병원 유한욱 교수
분당차여성병원 유한욱 교수

유한욱 교수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 마운트 시나이병원 유태인 유전학센터에서 연수한 뒤 미국의학유전학전문의를 취득했다.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클리닉 소장을 거쳐 소아청소년병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분당차여성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한소아내분비학회장, 대한의학유전학회 이사장, 복지부 선천성기형 및 유전질환 유전체연구센터장, 진흥원 희귀난치병정복사업 기획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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