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코드조차 없는 극희귀질환 ‘한랭응집소병’…국내 100명 정도 추산
극심한 빈혈·혈전성 합병증 유발…5년 내 사망률 39% 자가면역 혈액질환

몇 년 전부터 항상 몸이 춥고 숨이 찼다는 64세 A씨는 동네의원에서 혈액검사를 하고 ‘원인미상의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고 가만히 누워있어도 숨이 차는 등 증상은 날로 나빠졌다. 냉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다보니 사계절 내내 두꺼운 양말과 덧신, 털장감을 착용해야 했다. 지글지글 끓는 듯한 통증을 참기 힘들어 신경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흉부외과 등을 찾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다행히 동네 대학병원을 찾아 자신의 병명이 ‘한랭응집소병(Cold agglutinin disease, CAD)’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수많은 검사를 했어도 약도 처방 받지 못했으며, 앞으로의 예후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A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장준호 교수를 찾았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중증으로 떨어질 때마다 수혈로 증상을 관리한다. ‘한랭응집소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제가 우리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한랭응집소병’은 어떤 병?

‘한랭응집소병’은 적혈구 파괴가 지속·반복되는 자가면역 혈액 질환이다. 인구 100만명 당 약 0.5~1.9명에게 발생하는 극희귀질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내 유병 인구가 200명 이하로 유병률이 극히 낮거나 질병분류 코드가 없는 질환을 극희귀질환으로 구분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장준호 교수가 '한랭응집소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장준호 교수가 '한랭응집소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상 체온 미만에서 한랭 자가 항체가 적혈구의 특정 항원에 결합, 체내 면역시스템인 보체(complement)가 활성화되면서 적혈구가 파괴되는 현상인 ‘용혈’을 일으킨다.

적혈구는 우리 몸에 산소를 운반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용혈 현상이 지속, 반복되면 치명적인 빈혈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특히 용혈이 발생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게 된다. 이외에도 호흡곤란, 혈색소뇨증은 물론 한랭에 의한 말단 청색증, 레이노 현상, 망상피반 등의 다양한 증상이 유발된다.

기후와 무관하게 정상 체온 미만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찬물로 설거지를 한다거나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낼 때, 시원한 물을 마실 때 등에도 반응할 수 있다. 따라서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의 경우 여름에도 선풍기나 에어컨 사용이 불가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장준호 교수는 “국내에 100명 정도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우리나라에는 한랭응집소병에 대한 질병분류 코드가 없다보니 정확한 유병 환자 집계가 불가하다”며 “현재 삼성서울병원에 다니는 환자만 대략 10여명”이라고 소개했다.

‘한랭응집소병’은 어떻게 진단하나?

한랭응집소병을 진단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진단은 글로블린 검사법을 이용한다.

만성적인 용혈이 있는 상황에서 악성종양 및 염증 같은 기저질환이 부재함에도 다특이 직접 항글로블린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고 C3d 단특이 직접 항글로블린 검사와 한랭응집소 검사에서 강한 양성이 나오면 한랭응집소병으로 진단한다.

하지만 한랭응집소병은 의료진도 잘 모를 정도로 인지도가 낮은 질환이다. 그렇다 보니 진단이 지연되거나 진단 전까지 여러 병원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의사가 한랭응집소병을 의심하지 않는 이상 진단자체가 불가능한 질환이다.

한랭응집소의 진단
한랭응집소의 진단

‘한랭응집소병’ 치료는?

힘들게 진단을 받더라도 우리나라에는 한랭응집소병에 허가된 약이 없기 때문에 체온이 정상 미만으로 떨어져 중증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추위나 냉기를 피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엽산을 복용하거나 급성 용혈 시 혈장 교환술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다.

중증으로 진행되면 빈혈과 피로감이 삶의 질과 일상생활 수행능력을 저하시킬 정도로 극심해지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라도 빈혈을 완화해 주기 위해 수혈을 한다. 그러나 여러 번의 수혈에도 심각한 빈혈을 겪는 환자들이 있는가 하면, 수혈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외에 B세포 표적치료나 보체 표적치료법이 검토되고 있지만 허가되지 않은 제제로 치료효과가 불충분하고 독성 및 감염의 위험이 있다는 게 장준호 교수의 설명이다.

사망률 39% 한랭응집소병, 수혈하면 살 수 있다?

중증으로 진행될 경우 수혈이 환자의 상태를 완화시켜줄 수는 있지만 수혈이 한랭응집소병에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니다. 더욱이 헌혈인구 감소로 헌혈량이 급감하면서 수혈 또한 쉽지 않다.

특히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은 혈전 색전증이 유발될 수 있어 사망 위험이 매우 높다.

장 교수는 “수혈하면 되는데 사망률은 왜 그렇게 높지 생각할 수 있는데 한랭응집소병은 사망 원인 1위가 혈전 색전증일 정도로 일반인들보다 혈전성 합병증 발생률이 높다”며 “혈전이 생기면 심한 뇌경색이나 심장마비가 오거나 아니면 중요한 혈관들이 막혀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혈전 색전증은 1년 사망률이 20%에 달하는 치명적인 합병증이다. 한랭응집소병 환자의 혈전 발병률은 1,000명 당 30.4명으로, 비 한랭응집소병 인구의 1,000명 당 18.6명 대비 2배 가량 높다. 이에 한랭응집소병 환자의 1년 및 5년 사망률은 각각 17%와 39%에 달하며, 진단 후 생존여명은 8.5년에 그친다.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장준호 교수.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장준호 교수.

장 교수는 보통 혈전을 예방하기 위해 항응고제를 복용하지만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은 이마저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에게 혈전이 생기는 원인이 보체에 의한 것, 적혈구 자체에 의한 것, 혈액 응고 시스템에 의한 것 등 3가지인데 응고 시스템에 의한 혈전을 막기 위해 항응고제를 투여한다고 해도 나머지 2가지 요인으로 혈전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희귀질환 컨트롤 타워 부재…조직적 관리 절실”

그렇다면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이 일반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걸까.

장 교수는 “현재 한랭응집소병 보체 표적치료제가 개발돼 미국과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고, 유럽에서도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며 “치료제 효과는 매우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또한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PNH) 환자의 경우에도 치료제 개발 전에는 사망률이 매우 높았지만 치료제가 사용된 후 일반인과 비슷한 사망률을 보일 정도로 개선됐다"며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의 경우에도 치료제가 도입돼 사용된다면 상황이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환자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신약이 언제 국내에 들어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더욱이 한랭응집소병은 현재 질병분류 코드조차 없다.

장 교수는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은 워낙 극소수다보니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다. 인구 100만 명당 0.5에서 1.5명인 환자들의 목소리가 와닿을 수 있겠냐”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희귀질환에 대한 보장성을 강화하겠다고 한 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패스트트랙으로 들어오는 질환들이 많지만 정작 한랭응집소병은 질병코드조차 없어 패스트트랙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장 교수는 정부가 희귀질환을 조직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컨트롤 타워를 설치해 치료제가 나왔을 때 빠르게 환자들에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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