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과대학 분당차여성병원 소아청소년과 유한욱 교수

지난 칼럼에 이어 네번째로 희귀유전질환의 치료전략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전략은 어떻게 보면 기존에 존재하는 약물의 재활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drug repositioning’ 또는 ‘drug repurposing’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의약품 재포지셔닝’, ‘의약품 재창출’, 또는 ‘의약품 재활용’ 등의 용어로 번역돼 사용되고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완벽한 단어는 아니지만 여기서는 ‘의약품 재포지셔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이 용어는 기존에 개발되어 사용되던 약물을 새로운 질병(적응증)의 치료에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적응증을 확대, 추가, 또는 변경하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보다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승인된 의약품이나 개발 중인 약물의 새로운 용도(적응증)를 개발하는 것으로, 새로운 질병 치료제를 발굴하기 위한 매력적인 전략이다. 사실 최근 수년간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희귀약품으로 승인 받는 의약품의 약 40% 정도가 ‘의약품 재포지셔닝’ 전략으로 개발 승인된 것이다. 

왜 이 전략이 새로운 의약품개발전략으로 각광을 받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낮은 개발 비용, 빠른 시간과 성공률 때문이다. 전통적인 약물개발 방법은 기초연구, 임상 전 연구, 임상연구(1·2·3상)를 거쳐야 해서 대개 한 개의 신약을 개발하는데 10~15년 정도 걸리고 성공률도 10% 미만이라고 한다.

반면 ‘의약품 재포지셔닝’ 전략은 이미 승인된 약물의 안전성과 유효성 정보가 있어 새로운 임상시험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절약된다. 아울러서 이미 잘 알려진 약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새로운 재개발 단계에서의 위험이 감소한다. 기초연구 및 안전성을 알아보는 임상 1상연구가 생략되기도 해 기간도 3~12년 정도로 단축되고 성공률도 30~75%에 이른다. 

특히 희귀질환의 치료제는 전체 희귀질환의 5% 미만에서만 개발되어 치료 면에서 미충족니즈(unmet needs)가 매우 크다. 따라서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안전한 의약품을 빠르게 개발하기 위해서는 기존 약물을 새로운 용도(적응증)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의약품 재포지셔닝’ 전략이 중요하다. 

현재 ‘의약품 재포지셔닝’을 활용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는 컴퓨터 기술과 생물정보학의 발전에 기인한다. 컴퓨터 모델링과 생물정보학 기술을 활용하면 기존 약물의 새로운 효능을 예측하고 발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제 임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약품들의 부수적 효과, 부작용까지 면밀히 데이터베이스화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의약품의 시판 후 검사, 희귀의약품을 투여 받고 있는 환자들의 등록사업이 매우 중요하다. 정부와 의약품 관련 기관에서 ‘의약품 재포지셔닝’ 연구를 지원하고 법적 장애물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약산업계에서도 ‘의약품 재포지셔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존 약물의 잠재적인 새로운 용도를 찾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의약품 재포지셔닝’의 역사는 아스피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아스피린은 고열, 통증 및 염증을 줄이는 효과로 잘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고열 및 통증 완화제로 널리 사용됐지만 1950년대에 아스피린의 항혈소판 효과가 발견됐다. 혈소판 응집을 억제하여 혈전 형성을 막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심장 질환 예방을 위해 아스피린이 사용될 수 있음이 제기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아스피린이 혈전성 질환 예방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그러면 희귀질환의 경우는 어떠한가? 발기부전치료제인 실데나필이 신생아 폐동맥고혈압에 사용된다든지, 항고혈압치료제들이 희귀질환인 마르팡증후군의 대동맥박리를 예방하기 위해 사용된다든지, 신경증상이 동반된 고셔병 환자에서 진해거담제인 앰브록솔이 효소대체요법과 함께 사용되어 신경증상을 완화시킨다든지 하는 것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탈리도마이드란 약은 과거 1950년대에 독일에서 진정제로 개발되어 의사처방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안전한 약으로 여겨졌다. 임산부들의 입덧을 치료하는데 사용됐다. 그 후 탈리도마이드 때문에 팔, 다리 기형을 가진 아가들이 출생하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자 이 약은 시장에서 퇴출됐다. 그러나 신생혈관 억제라는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이 오히려 한센병과 다발성 골수종, 암 등의 치료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제한된 경우에만 사용되고 있다. 이런 경우는 drug repurposing(drug repositioning)이란 단어를 ‘의약품 재활용’이라는 단어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겠다. 

반대로 유병률이 높지 않은 드문 질환의 병태 생리에 근거하여 개발된 약물들이 매우 흔한 질환들에 사용되는 예도 있다.  희귀질환인 PCSK9 유전자의 기능항진 돌연변이에 의한 심한 고콜레스테롤혈증환자에서 사용하는 항체치료제를 다양한 원인의 심한 고콜레스테롤 환자에서 사용한다든지, 드문 경우이지만 SGLT2라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신장세뇨관에서 포도당이 재흡수되는 능력이 저하되어 혈액의 포도당수치는 정상이지만 소변에 포도당이 배설되는 질환이 아닌 희귀한 condition인 신성당뇨라는 것이 있다. 

신성당뇨의 병태생리학적 기전에 근거하여 SGLT2 억제제를 개발하여 2형 당뇨병환자의 치료제로 사용한다든지, 처음에는 당뇨병치료제로 개발된 GLP-1 수용체자극 약물이 당뇨병 치료 중에 식욕과 체중이 감소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만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여 비만치료제로 승인받은 경우라던지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와 같이 기존에 승인된 약품들을 다양한 임상시험을 통해 적응증을 확대하거나 변경하고자 하는 연구들이 진행중이다. 희귀질환의 치료에 사용되던 희귀약품이 한 순간에 흔한 질환들에 사용되는 소위 ‘블록버스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상기한 바와 같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미 부작용때문에 시장에서 퇴출된 의약품이 소환되기도 하고 임상시험과정에 특정한 적응증으로는 실패한 약물들이 다른 기전에 주목함으로 새로운 치료제로 개발될 가능성도 있다. 그야말로 꺼진 불도 다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의약품 재포지셔닝’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도 면밀한 임상가의 관찰과 연구자의 약물기전과 발병기전과의 접합점을 찾는 통찰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분당차병원 유한욱 교수
분당차병원 유한욱 교수

유한욱 교수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 마운트 시나이병원 유태인 유전학센터에서 연수한 뒤 미국의학유전학전문의를 취득했다.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클리닉 소장을 거쳐 소아청소년병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분당차여성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한소아내분비학회장, 대한의학유전학회 이사장, 복지부 선천성기형 및 유전질환 유전체연구센터장, 진흥원 희귀난치병정복사업 기획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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