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의료연구회 이재호 회장(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민간의료기관의 비율이 90%를 넘어 기형적이다. 시장이 공공을 압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국민건강보험이 존재하지만 정책당국은 시장 실패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은 공공병원들조차 민간병원과 같은 조건에서 환자 유치 경쟁을 하느라 과잉검진-과잉진단을 일삼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영병원, 국립암센터, 서울대병원 등 대표적인 공공 병원들이 검진센터를 운영한다는 것 그 자체가 기형적이지만,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더 크므로 하지 말아야 할 검사들을 검진항목에 포함시켜 과잉진단-과잉치료를 부추기고 있다.
공공병원이 이러하니 민간병원은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갑상선암 과잉진단이 가장 심한 국가가 됐다. 10년 전 갑상선암 과잉진단 저지를 위한 의사연대가 과잉진단 대책을 촉구한 바 있지만, 그 동안 정부는 과잉진단을 예방할 수 있는 정책을 거의 시행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민의 주치의 보유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다. 사회적으로 합의한 일차의료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주치의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진국 정부와 미국의 민간보험도 권장하는 주치의 보유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건강보험은 홍보하거나 제도화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국민은 증상‧질병 별로 각종 전문의들을 직접 만나 짧은 진료시간 동안 분절화한 의료서비스를 받는 데 적응해 왔다. 이를 두고 접근성이 우수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착각이다. 무분별한 의료이용으로 중복처방과 중복검사가 극심하며 의료비를 비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항생제 내성비율이 높으며 노인에서 다약제 약물복용 비율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국민 1인당 연간 의사 진료 빈도가 OECD 1위를 10년 이상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차의료 영역에서 주치의와 일차의료팀에 의해서 관리를 잘 받으면 입원을 피할 수 있는 만성질환에 대해서도,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는 비율이 매우 높다. 호미로 막을 것으로 가래로 막는 격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의료비 상승 속도, 인구대비 병상 수와 그 증가 속도는 OECD 최고이다.
지난 2월 1일 정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는 의대정원 확대, 지역의료 강화 등 4대 개혁과제로 구성돼 있다. 그 중에서 의대 정원 확대가 가장 쟁점으로 부각돼 이에 반대하는 의사단체의 집단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인인구의 가파른 증가 속에서 점증하는 의료수요를 고려하면 의대 정원 확대 그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만 총선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현대 의대정원인 3,058명의 65.4%인 2,000명을 한꺼번에 증원한다는 일방적 정책 발표에 대해서는 의료계 안팎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또한 교육 현장에서의 혼란과 교육의 질 저하를 우려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내 의료체계 핵심 개혁과제인 공공의료 확충과 일차의료 강화에 관한 내용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역인재 전형으로 비수도권 의대 정원의 40% 이상을 지역 선발로 의무화 하더라도, 그 의사들이 수도권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주치의제도 도입 대신에 전달체계 개편이라는 구태의연하고 모호한 용어 사용도 문제다. 주치의제도 없이 권역 병의원진료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을 쌓는 일이다. 이 같은 정책 기조 속에서 증원된 2,000명의 의사들이 매년 경쟁 대열에 가세해 피부미용 분야로 진출한다면, 현재의 왜곡을 더 심화시킬 것이다.
의대 정원 증원보다 더 중요한 정책은 우리나라 의료체계에서 시장의 영향력을 줄이는 정책이다. 주치의제도 도입을 통한 일차의료 강화와 공공의료 확충이 의대정원 증원보다 우선돼야 한다. 정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필수’가 빠져 있다.
<코리아헬스로그 자매지 청년의사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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